파도와 포말

주절거림

by 구름

그런 날이 있다. 그냥 주저리주저리 뭐라도 쓰고 싶어지는 날. 그런 욕구가 문득 치솟을 때가 있다. 뭔가를 쓰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은 그런 감각이. 지금의 내 감정인지, 생각인지를 그냥 털어놓고만 싶을 때가. 그런 순간들이 언제곤 찾아온다. 지금의 내가 그러하고 있는 것처럼. 최근에 묵호에 다녀왔다. 원래 겨울이라면 질색을 하는 나는 추위가 몰려오기 시작하면 온몸이 수그러지며 칩거와 비슷한 생활을 한다. 최소한의 외출만을 고집하며 침대 속에 파고들어 꼼짝 않고는 그저 내년 봄이 오기만을 간절히 바란다. 그래서 여행을 좋아하지만 겨울에는 따뜻한 나라가 아닌 이상 여행을 떠나지 않는다. 살을 에리는 그 감각은 내게 공포스럽기만 하다. 그런데 올해 겨울이 그다지 춥지 않은 탓인지, 아니면 나도 나이를 먹은 탓인지 이상하게 며칠 전부터 차가운 겨울 바다가 보고 싶어졌다. 그동안의 나라면 어디를 간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아야 정상인데 이번에는 코 끝이 찡해지고 심장 안쪽이 찌릿해지는 차가운 바닷바람을 맞으며 그 푸른 바다가 보고 싶었다. 바다에 가기까지의 결정은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동안 머릿속으로 바다를 보러 가는 상상을 하며 나의 귀찮음과 추위에 대한 공포를 저울질해가며 무엇이 더 무겁고 중요한지를 판가름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상하게 추가 푸른 바다 쪽으로 기울었다. 그 즉시 나는 곧바로 다음 날 열차를 예매하고는 해가 뜨기도 전인 첫차를 타고 묵호로 떠났다. 점점 밝아오는 하늘을 보며 내 눈앞에 그려질 푸른 바다를 상상했다. 도착하자마자 바로 바다를 보러 갔다. 저 멀리 묵직한 습기를 머금은 공기와 짠내가 느껴지기 시작하자 내 심장은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멀리서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은 푸른색이 보이자 나는 나도 모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곳을 향해 빨리 가야 할 것만 같았다. 차가운 공기에 나의 볼과 귀는 빨개지고 손 끝의 감각은 없어졌지만 나는 다리를 멈추지 않았다. 그저 빨리 저 바다를 가까이 보고 싶었다.

바다는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아름다웠다. 박력 있는 파도에 숨이 턱 하고 막혔다. 그 끝을 알 수 있는 푸르름에 가슴이 탁 트였다. 그 순간 눈물이 왈칵하고 쏟아질 것만 같았다. 그린 듯한 그 아름다움에 마음이 일렁였다. 왜 아름다운 것을 보면 우리는 눈물이 나는 것일까. 아름다운 것을 보면 마음이 뭉클해지며 우울해지기도 하고 슬퍼지기도 하고 애틋하기도 하고 황홀하기도 하고 초라해지기도 한다. 왜 그런 감정이 드는 것일까. 아름다운 것들은 왜 나를 한없이 기쁘게 하면서도 한없이 추락하는 기분을 느끼게 하는 것일까. 서늘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홀린 듯 바다에 가까이 다가갔다. 코 끝이 찡해지는 것이 감정이 북받쳐서인지 추워서인지 가늠이 가지 않았다. 추위를 잊은 채 모래에 철퍼덕 앉아 그 끝없이 펼쳐지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파도 끝에 생겨나는 하얀 포말이 너무 아름다워서 눈이 부셨다. 모든 것을 다 쓸어버리는 파도가 무서우면서도 나도 저렇게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거센 파도 끝에 펼쳐지는 빛나는 하얀 포말이 되고 싶었다. 나도 저렇게 빛나고 싶었다. 그 대자연 앞에 나는 한없이 작아졌다. 내가 보잘것없이 느껴졌다. 그런데 그게 슬프게도 내겐 왠지 위로가 되었다. 이 거대한 파도 앞에 우리는 모두 동일하고 동등했다. 넓은 바다 앞에 우리는 한없이 작고 약한 존재다. 그 사실에 우울하고 숨이 턱 막히면서 이상하게도 마음이 울렁거리고 눈물이 흐르고 위로가 됐다. 나는 이래서 그렇게 바다를 보고 싶었던 것일까.

저 거센 파도를 계속 바라보자 꼭 저 파도가 우리들의 인생 같았다. 쉼 없고 거침없이 몰려오는 파도를 막기란 쉽지 않다. 언제든 파도에 대비를 해야 한다. 작든 크든 파도는 나에게 어떠한 동요와 고통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파도가 치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없다. 하지만 그것을 끝내 잘 넘기면 그 끝에는 빛나는 포말이 남는다. 그 포말은 나의 성장일지, 깨달음일지, 행복일지, 눈물일지 알 수 없지만. 일단 내게 무언가가 남는다. 그렇게 인생이란 파도와 포말이다. 빛나는 포말을 보기 위해서는 끝없이 치는 파도를 견디고 이겨내야 한다. 하지만 거센 파도 앞에 그것을 견뎌낼 용기는 점점 사라진다. 반짝이는 포말은 언제 봤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괴로움에 꼭 포말을 봐야 하는 것일까 라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치는 파도라면, 피할 수 없다면, 그 끝에 부서질 듯 빛나는 포말을 보는 것이 더 멋지지 않을까. 이왕이면 새하얗게 흩어지는 물거품을 보는 것이 더 찬란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뒤로 멍하니 파도가 치는 것을 바라보다 위로 올라갔다. 더 넓은 바다를 보기 위해 전망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위에서 올려다본 풍경도 아름다웠다. 그 끝을 알 수 없어 끝이 어디일지 더 궁금하고 호기심이 일고 그 짙은 푸른색에 소름이 돋고 공포가 몰려오지만 눈이 시릴정도로 빛나고 아름다운 그 바다가 그곳에 있었다. 숨이 탁 트이는 그 풍경에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쉴 수밖에 없었다. 이 풍경을 영원히 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의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귀와 손에 감각이 없는 것을 깨닫고는 근처 카페로 가 몸을 녹이며 창밖에 펼쳐진 바다를 소리 없이 바라봤다. 하지만 역시 바다는 철썩이는 소리를 들으며 습기와 짠내를 느끼며 눈물이 핑돌고 코 끝이 찡해지며 보는 것이 최고다. 그것을 느끼며 커피를 홀짝이며 언 몸을 녹였다. 몸도 녹였겠다 근처에서 밥을 먹고는 다시 당연하게 바다를 보러 갔다. 질리지도 않는 그 풍경에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그러다 다시 버스를 타고는 서울로 돌아왔다.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나는 깜깜한 창밖을 보며 다시금 그 박력 있는 파도를 떠올렸다. 여전히 그 파도가 무섭지만 그래도 오늘 그 거센 파도에 조금은 부딪혀볼 용기가 생긴 것 같다. 나도 빛나는 포말을 볼 수 있겠지. 그럴 거라고 믿고 싶다. 나도 용기를 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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