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 프리메로
오늘날 손목 시계의 존재 이유를 묻는다면 “시간을 보기 위해서”는 시대착오적 답변일 수도. “지위를 나타내기 위해서”나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을 표현하기 위해서”와 같이 사회적 기능을 에두른 표현이 오히려 적합하다. 전문 다이버들을 위해 태어난 블랙베이, 서브마리너, 피프티패덤즈나 군납용 카키필드, 라디오미르가 대중의 사랑을 받는 것만 봐도 그렇다.
쿼츠 시계의 등장은 손목 시계의 대중화 뿐만 아니라 양극화를 부추겼고, 스위스제 시계는 마케팅 전략을 덮어쓴 ‘명품’이 되어 모회사에 속해서나 독자적으로나 horlogerie를 행하고 있다. 사회적 기능의 비중이 넓어짐에 따라 골드 케이스 또는 보석을 올려 하이주얼리의 영역을 기웃거리는 타임피스도 여렵잖게 눈에 띤다. 이들도 공예의 한 분야요, 문화 풍부에 기여한다는 점에서 가치를 두겠지만 시계의 본질은 핸즈를 움직이는 심장, ‘무브먼트’다.
엘 프리메로는 제니스의 성정과도 같다. 1970년대 제작이 중단된 이 무브먼트는 역사 속 한 줄로 남을 뻔 하였으나 벽장 뒤 공간에 숨겨진 덕에 오늘날까지 발전되어 제니스 무브먼트의 주춧돌이 되었다. 드라마틱한 역사의 뛰어난 고진동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는 1980년대 롤렉스의 심장.
신세계백화점 옥외 광고에 대문짝만하게 걸린 데피 스카이라인은 본질에 충실하기에 매력적임. 시계의 브랜드를 따지는 것 역시 디자인과 더불어 주관의 영역이지만 훌륭한 심장을 지닌 제니스도 눈여겨 보면 좋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