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 만든 핫케이크에 버터를 올려서 먹어본 적 있나? 핫케이크 가루 포장지에 쓰인 것보다 우유를 두 배 정도 많이 넣고 계피스틱을 하나 넣어 하룻밤 숙성시킨 반죽으로 손바닥만큼 작게 구워서 대여섯 장을 접시에 쌓아올린 후에 버터 덩어리를 올려서 함께 먹는 거. 내 접시에 핫케이크와 버터를 놓고 다음 핫케이크를 굽다 보면 아무리 균일하게 구우려고 해도 미세하게 날 수밖에 없는 핫케이크 탑의 경사 때문에 반쯤 녹은 버터가 탑 밑으로 미끄러져 떨어지곤 했다. 부풀리듯이 구워서 예쁜 핫케이크. 잘 구워진 갈색의 납작한 빵에 버터가 스며들어서 반들거리는 걸 보면 몸무게나 콜레스테롤 같은 건 아무래도 좋은 일이 된다.
버터를 굳이 핫케이크 위에 올리지 않아도 좋다. 살구나 자두를 신맛이 많이 나게 만든 잼에 가염버터를 섞고 한입에 들어갈 정도로 작게 만든 핫케이크로 찍어 먹거나 아무 빵이랑 같이 먹으면 맛있다. 갓 구운 식빵이나 바게트, 스콘, 크루아상. 탄수화물이라면 뭐든 좋고 탄수화물이 아니라 고깃조각이라도. 버터는 맛있다.
그 글을 읽은 적이 있다면 이야기가 좀 더 쉬워질 텐데. 가디언지에서 2022년 첫날 올린 아티클 [별로 노력하지 않고 삶을 약간 낫게 만드는 100가지 방법]. 안 읽어 봤으면 읽어서 손해보는 건 어차피 브런치 글이나 보면서 낭비될 예정이었을 시간밖에 없으니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 평소 자기 생활에 해당되는 항목이 몇 개쯤 있다면 그걸 보면서 흐뭇해할 수도 있으니까.
혹시 너무 시간이 없어서 도저히 저 많은 영어 문장들을 다 읽어내지 못하겠다면 그냥 이 글을 더 이상 읽지 말고 자기 할 일에 집중하는 걸 추천하고 싶지만, 정말 도저히 시간이 안 나는데 그래서 더더욱 브런치글을 읽으면서 시간을 낭비하는 식으로 자기를 더 몰아붙이고 싶은 자기파괴적인 욕구를 이겨낼 수 없다면 그냥 35번만 읽어라. 아니다. 그냥 내가 가져오는 게 좋겠다. 거기 35번은 이런 문장이 쓰여져 있다.
내가 유일하게 지키는 항목이다. 정말 중요해서 수고를 들여 글씨 크기도 제목3으로 키웠고 글꼴도 helvetica로 바꿨다. 영국인들 생활방식은 동양인 여자애인 내가 동의할 수 없는 게 많지만(과일을 침대에 가져가라니, 벌레 꼬일 일 있나?) 이것만큼은 전적으로 동의한다. 무염버터는 베이킹용으로 쓸 게 아니라면 그냥 더 필요한 사람이 사갈 수 있게 마트 유제품 코너에 내버려두는 걸 추천한다. 이 글을 보고 있는 당신이 아무것도 사지 않고 마트 유제품 코너를 떠난 바로 오 분 뒤에 갑자기 급하게 케이크를 열 개쯤 구워야 하는 사람이 들이닥칠지 누가 알겠어? 세상에는 믿을 수 없는 일이 많이 일어나니 무염버터는 있을지도 모르고 없을지도 모르는 슈뢰딩거의 케이크 제작자에게 양보해라. 누가 알겠어? 이 글로 당신이 급하게 케이크 열 개를 구워야 할 때 기적적으로 필요한 양의 버터를 공수할 수 있을지. 공익을 위해 무염버터는 그냥 유제품 코너에 내버려 둬야 한다.
나는 이미 가염버터를 먹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사람인 글자수세기 기준 공백 포함 976자를 소모했다. 공백 제외하면 725자긴 하지만 내가 만약 수고를 들여 이 단어들 사이사이에 공백을 넣지 않았다면 이 글을 읽는 사람은 더 많은 수고를 들여 글 내용을 해독해야 했을 테니까 모든 글자수는 공백포함으로 통일한다. 한국어는 띄어쓰기까지 문법이다.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뭐... 제가 어떻게 신경쓸 일은 아닌 것 같으니 그냥 사시던 대로 사세요. 세상에 천재들이 태어났으니 몇 명은 그래도 될 것 같네요.
어쨌든. 우리는 가염버터를 먹어야 한다. 어차피 버터 먹을 건데 버터에 든 소금 함량이 중요한가? 소금 그거 좀 덜 먹는다고 버터 칼로리가 막 100g에 10kcal쯤 될 것 같나? 참고로 버터 칼로리는 100g에 716.8kcal이다. 내가 직접 확인한 건 아니지만 구글이 알려줬으니 대충 그 언저리일 것이다. 버터는 살찐다. 유지방 덩어리니까. 사람 아기가 모유만 마시고도 밀가루반죽처럼 뽀얀 살이 포동포동한 게 다 이유가 있다. 소 아기를 살찌우기 위해 소가 온 힘을 다해 뽑아낸 우유에서 기름 성분만 모아 나온 게 크림이고, 그 크림에서 다시 기름만 더더더 모은 게 버터니 알만하다. 버터는 비만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그러니까 버터에 들어간 소금 가지고 건강에 예민한 척 할 거면 그냥 버터 말고 식물성 마가린(우웩)이나 먹는 게 나을 거다. 난 평생 버터 대신 마가린을 먹고 사느니 그냥 뚱뚱해지는 걸 택하겠다.
내가 이렇게 가염버터에 미친 사람처럼 버터 이야기를 해버렸지만 난 사실 먹어본 버터가 그렇게 많지 않다. 입맛이 까다롭지도 않은데 식재료에 그 정도의 열정은 별로 들이고 싶지 않아서일지도 모른다. 일단 내 전공은 식품 쪽이 아니니까. 주말에 시판 믹스 가루로 핫케이크를 만들어서 버터 올려 먹는 걸 좋아하는 사람에게 딱 맞는 열정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이 문장을 쓰고 있는 건 오전 1시 26분인데 오밤중에 브런치에 버터 이야기나 하고 있는 사람의 말은 별로 믿고 싶지 않겠지만. 난 정말로 그게 버터기만 하면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막입이거든.
내가 오랬동안 먹어왔던(아마 태어나서 처음 접했을) 버터는 루어팍 포션(소분하지 않아도 돼서 편하니까) 가염버터였다. 작게 소분되어 있고 핥으면 짭짤하고 밥이나 갓 구운 빵 위에 올리면 깜짝 놀랄 만큼 투명한 황금색으로 잘 녹는다. 루어팍에 만족하고 새로운 버터를 시도해보지 않은 채 일생을 보낼 수 있었다고 행각한다. 하지만 열흘 붉은 꽃은 없고 마트 유제품 코너는 언젠가 바뀐다. 내가 중학교에 다닐 때쯤 집 근처 마트에 더이상 루어팍 버터가 들어오지 않게 돼서 별수없이 들어오는 다른 버터를 먹기 시작했다. 식물성 버터(마가린)같은 거 말고 유지방으로만 만들어진 100g 716.8kca짜리 진짜 버터들을.
일단 국내 버터는 전부 의심하고 시작했다. 어디선가 대충 식물성 버터나 식물성 아침에버터같은 상품명으로 마가린을 판매하고 있다는 글을 본 이후부터 그냥 그렇게 되더라. 원래 아예 모르거나 엄청 많이 아는 사람보다 조금 아는 사람이 더 무섭다. 아는 건 없는데 고집이 세면 더 무섭다. 그래도 버터가 식물성인 순간부터 별로 믿을만한 건 아니니까. 버터는 소젖이다. 우유를 얻기 위해 젖소(주로 홀스타인 종, 가끔씩 산유량은 적지만 유지율이 높은 저지 종) 암컷은 일 년에 한 번씩 임신하는데(혹시 젖소가 임신하지 않은 몸으로 전지구인이 마실 우유를 뽑아내는 마법의 생물이라고 생각했으면 그냥 계속 그렇게 머릿속 들장미 화원이나 키우면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모르는 건 때로는 죄가 되지만 난 적어도 이 글에서만큼은 동물권 쪽 이슈로 씨름하고 싶은 생각이 없고 그냥 버터 이야기나 좀 보려고 브런치글을 읽는 중인 선량한 우유 먹는 사람에게 죄책감을 안겨주고 싶은 마음도 당연히 없다.) 식물성으로 버터를 만들 수 있다면 왜 굳이 그 많은 젖소들이 필요할까?
모든 버터는 동물성이다. 식물성 버터는 가짜다. 공허한 식물성 기름을 대충 버터처럼 보이게 허옇게 굳혀서 네모낳게 잘라뒀다고 버터라니 천인공노할 일이다. 곧 단백질 강화 식물성 버터라고 이름붙인 그냥 두부가 팔릴 날도 머지않았다.
내가 그래서 최근 먹는 건 서울우유 버터와 이즈니 버터 두 가지다. 너무 적은가? 버터 종류별 맛 후기를 원한다면 네이버 블로그에 남이 써둔 게 많으니 그쪽을 보는 게 훨씬 목적에 부합할 것이다. 이미 여기까지 읽어버린 시점에서 이런 말을 하자니 좀 미안하지만 이 글은 버터 브랜드 추천글과는 거리가 멀다. 그냥 오밤중에 할 일은 많지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현실도피용으로 쓰고 있는 글이니까. 속았다고 생각해도 어쩔 수 없다. 인생이란 게 원래 가끔 그런 거다. 어쩌겠어. 이미 봤는데. 다만 몇백 원이라도 결제하고 봤다면 정식으로 항의할 수 있었겠지만 이 글은 완벽한 무료다. 우리 모두에게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아차. 서울우유 버터는 신기할 정도로 우유로 만들었다는 느낌이 안 나게 미세한 짠맛과 고소한 유지방 맛 정도가 났고 이즈니 버터는 유제품같은 향이 났다. 사실 대충 입에 들어가면 못 먹을 것 빼고는 거의 다 잘 먹고 맛 평론가하고는 거리가 멀어서 그냥 다 그럭저럭 먹을만한 버터였다. 어젯밤 새벽 두 시 쯤에 쓰다 만 글을 자고 일어나서 오전수업도 다녀온 오후 세 시쯤에 보니 진짜 가관이다. 그래서 이 모든 글줄들을 나열하면서까지 최종적으로 하고싶은 말이 뭐였는지는 어제 잠들기 전의 나만이 알 것 같다. 테세우스의 배 문제다. 어제 잠들기 전의 나는 지금의 나와 정확히 같은 사람인가? 아니면 대충 같은 기억과 대충 비슷한 몸을 가지고 살아가는 다른 사람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