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뜨고 가장 처음 본 하늘은 회색의 구름들로 가득 찬 날이다. 나무들은 생기를 잃고, 아파트나 상가 건물들은 모두 잿빛으로 하루를 반긴다. 지나가는 차들도 소리 없이 흘러간다. 한호는 미묘한 표정의 변화 없이 하루를 준비한다. 그는 여전히 자고 일어나는 게 불편하다. 며칠 사이에 자는 시간이 줄어들고, 입꼬리가 쉽사리 올라가지 않는다. 한호의 방엔 다 마신 생수병만이 가끔씩 요란한 소리를 낸다.
아침의 시작은 며칠 전 대화를 떠올리는 것이다. 한호 본인도 모른 채 그날의 일들이 계속 떠오른다. 그리고 스스로 인생 최악의 실수라고 생각하며 자책한다. 늘 고민의 끝은 반문이다. ‘왜 그랬을까?’ 혹은 ’어떻게 해야 했을까?’ 질문들이 서로 얽혀 한호를 늪으로 끌어내린다. 엘리베이터 속 거울을 본다. 거뭇한 수염과 퀭한 눈이 보기 싫게 자리를 잡는다. 마음을 고쳐먹으려 해도 저 꼴불견 한 모습이 쉬이 마음을 잡기 어렵게 만든다.
한호는 무작정 나간다. 터덜 터덜 힘 빠진 걸음이다. 편의점 앞에 앉아 담뱃갑을 꺼낸다. 라이터는 보이질 않아 편의점에 들어가 라이터를 하나 산다. 후~ 아무리 세게 불어도 차오르는 건 없다. 다시 편의점에 들어간다. 먹을만한 것 몇 가지와 생수병을 하나 챙겨서 나온다.
마침 전화가 온다. 친구 태훈이다. 반가운 목소리로 한호를 찾는다. 한호는 애써 심드렁한 목소리로 태훈의 전화에 응답한다. 한호는 태훈의 전화를 마치고 집으로 조용히 걷는다. 아직 태훈과의 약속까지 시간이 꽤 남았다.
한호는 어느새 집에 누워있었다. 시간을 확인할 필요 없이 창문 바깥을 보니 이미 하늘 까맣고 여전히 흐리다. 주변의 핸드폰을 찾으려 하지만 이내 보이지 않는다. 한호는 다시 누워 자신이 어떻게 이곳까지 다시 왔는지 떠올리려고 한다. 숙취로 인해 머리가 아프고, 애써 떠올리고 싶지 않아 포기한다. 그저 다시 천장을 보다가 스르르 잠들기를 바란다. 유난히 조용한 밤이다. 평소라면 술 마시고 취한 사람들의 떠드는 소리나, 한 둘 요란하게 울리는 차 소리가 들려야 하는데 고요하다. 오히려 한호의 귀에 들리는 건 깊은 곳에서 울리는 심장 소리이다. 규칙적으로 내는 그 리듬을 한호는 조용히 듣는다. 그 리듬이 조금씩 커지니, 한호는 그제야 당장 잠들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내 조용히 앉는다. 약간의 지끈거림이 있지만, 그래도 더 눕는 것보다 앉기를 택한다.
한호는 다시 주변을 더듬는다. 담배와 라이터를 찾는다. 그러나 보이질 않는다. 담배 몇 개비보다 라이터를 잃어버린 게 더 짜증 난다. 그제야 태훈과 마시던 술이 떠오른다. 한호는 심드렁하게 태훈과 만나 이야기를 했다. 태훈은 그저 조용히 듣기만 한다. 그리고 한호와 태훈이 술집에서 나왔을 때, 그곳에 라이터와 담배를 두고 왔다. 한호는 그 장면이 떠오른다. ‘젠장’ 딱히 사람도 없고 속으로 한호는 거칠게 내뱉는다.
텅- 요란한 빈 생수병이 내는 소리에 한호는 다시 잠에서 깬다. 위이잉- 어디선가 핸드폰이 울린다. 한호는 어제 입던 바지의 뒷 주머니에서 핸드폰과 지갑을 꺼낸다. 핸드폰엔 070으로 시작하는 번호가 떴다. 전원 버튼을 꾹 누르니. 핸드폰의 음성사서함으로 바로 연결된다. 핸드폰에서 높낮이 없는 기계음으로 무어라 무어라 말한다. 한호는 핸드폰을 이불 위로 툭하고 던진다. 냉장고를 열어 어제 사온 생수를 벌컥벌컥 마시더니 빈 생수병만 툭하고 던진다. 텅- 생수병은 요란하게 소리친다. 다시 담배와 라이터를 찾지만, 없는 걸 깨닫는다. 위이잉- 다시 핸드폰이 울린다. 한호는 끈질기게 울리는 저 핸드폰을 더 무시할 수 없어 확인한다. 태훈이다.
태훈이 남긴 메시지에 한호는 전화를 건다. 태연한 목소리가 들린다. 한호는 태훈과 이야기를 마치고 다시 핸드폰을 던져둔다. 후- 한숨을 뱉는다. 한호는 참을 수 없는 마음에 옷을 걸치고 담배를 사러 간다. 연거푸 담배를 피운다. 후-후- 편의점 바깥 의자에 앉은 한호의 눈에 사람들이 제각기 웃으며 지나가는 게 보인다.
띠링- 편의점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한호 옆에 서 담배를 피운다. 한호에게 물건을 판 편의점 직원이다. 쓰윽 한호를 쳐다보더니 괜스레 아는 척을 한다. ‘어제도 라이터를 사가지 않았나요?’ 예의가 가득한 말이 한호 귀에는 다르게 들린다. 따로 대꾸할 마음은 없지만, 마음과는 다르게 말한다. 점원은 한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담배를 마저 피운다. ‘수고하세요.’ 점원은 다가오는 손님을 발견하고 황급히 담배를 마저 태우고는 다시 편의점으로 들어간다. 한호는 다 피운 담배를 휙 하고 던진다.
태훈은 한호를 걱정했다. 술을 마시면서 한호의 이상한 모습이 자주 눈에 보였다. 마치 물속에 들어가는 사람처럼 숨을 흡- 하고 들이마시더니 후-하고 내뱉는 다음 무어라 무어라 이야기를 했다. 물론 그 자리에 주로 이야기한 것은 태훈이었다. 태훈이 보기에 괜히 잘못 말을 시켰다가 한호도 태훈도 더 좋아질 게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태훈은 이런 이야기를 여자친구에 이야기한다. 여자친구는 대수롭지 않게 듣는다.
한호는 그 자리에 계속 앉아 있다. 편의점 점원이 일을 마쳤는지 편의점 조끼를 벗고 다시 한호 옆에 선다. ‘태훈이 친구예요.’ 한호는 낯선 사람에게 익숙한 소리를 듣자 놀라 쳐다본다. 그녀는 단발머리에 태훈과 비슷한 키를 가졌다. 한호는 놀라 자세히 쳐다보니 눈이 조금 크고 앳된 얼굴을 가졌다. 아마 평소라면 장난을 쳤을 한호지만, 당장은 지닌 상황이 조금은 떨떠름할 뿐이다. 한호의 약한 반응에 수빈은 얼굴을 찌푸린다. 아침의 태훈의 이야기에 괜히 신경 써서 말을 걸며 얘기를 했는데 한호는 아무런 반응 없이 그저 가만히 있었다. 수빈은 그런 한호를 더욱더 약 오르게 하고 싶어 몇 마디 더 말을 건다.
‘이번 주말에 태훈이와 나고야에 가려고요. 한호 씨도 가보셨다고 하는데 어디 괜찮은 곳 있나요?’ 한호는 후- 한숨을 있는 힘껏 내뱉는다. 다시 흡-하고 길게 숨을 참는다. 수빈은 한호의 말에 조용히 답을 한다. ‘아 츠타야 서점. 고마워요.’ 수빈은 뒷 말을 덧붙이려다 참고는 휙 떠난다. 한호는 수빈이 가는 모습을 빤히 바라본다. 한호의 눈에는 그저 구름이 지나가는 모양과 같다. 한호에게 나고야는 츠타야 서점이 전부였다.
나고야엔 츠타야 서점이라고 있다. 이곳엔 착시효과를 만드는 거울이 있다. 벽 한 곳엔 책들이 가득하다. 그리고 천장에 거울을 설치해서 책장을 끝도 없이 나열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우리의 감정이라는 게 이런 거지 않을까? 실제론 끝이 있지만, 우리가 눈으로 보기엔 혹은 오감으로 느끼기엔 끝없이 빠지는. 한호는 츠타야 서점을 통해 여기까지 생각했다.
한호는 우연히 상길을 만났다. 상길은 지나가려는 한호를 붙잡았고, 한호는 또다시 새벽에 잠을 깼다. 핸드폰의 불빛이 번쩍이고 한호는 그 불빛 덕분에 잠에서 깼다. 새벽 두 시가 넘었다. 한호는 담배를 찾는다. 핸드폰도 담배도 손에 뻗으면 닿을 위치에 있다. 한호는 담배와 라이터를 찾고 바깥으로 나간다. 둥근달이 한호를 내려본다. 한호는 담뱃불을 붙여 조용히 둥근달을 노려보는 빛을 만든다. 연기에 따라 한호는 상길과 했던 이야기들이 떠오른다. 그게 아니었는데 딱히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한호는 담배를 모두 태우고는 바닥에 툭 하고 던진다. 그리고는 발로 비벼 혹시 모를 불씨를 끈다. 집으로 돌아와 냉장고에서 생수를 마신다. 요란하게 내던 생수통은 그새 치워서 들리지 않는다. 바깥에는 사람들이 상기된 목소리로 떠든다. 핸드폰엔 태훈이가 보낸 메시지가 몇 개 쌓여 있다.
태훈은 나고야에 갔다 오자마자 한호를 찾는다. 츠타야에 대해 뭐라 뭐라 떠든다. 태훈은 그러더니 한호의 얼굴을 본다. 태훈의 말에 한호는 괜히 손으로 얼굴을 만진다. 한호의 손에는 일본어로 써져 있는 기념품이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