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 박미경 옮김, 다산초당

by 혜안


사원, 승려, 계율, 이끼가 꼈을 정도로 오래된 종교에 대한 글을 읽을 때 여러분은 아마 가장 먼저 엄격한 통제와 상시 규칙적인 일상, 제약 그리고 은둔 같은 것들을 떠올렸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실제로 살았던 방식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낯선 사람들의 관용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했습니다.
거기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 있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네가 모르는 전투를 치르고 있다. 친절하라, 그 어느 때라도.

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라고 검색하자 뜨는 그야말로 온 얼굴을 다해 함박 웃음을 짓는 그의 사진. 자연스럽게 주름진 두 눈에 맑은 영혼이 비쳐 보이는 것 같다. 1961년 스웨덴에서 태어난 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는 대학 졸업 후 스물여섯 살에 다국적기업의 임원으로 지명된 직후 사직서를 냈다. 그 후 태국 밀림의 숲속 사원에 귀의해 '나티코', 즉 '지혜가 자라는 자'라는 법명을 받고 17년간 수행했다. 이 책은 그가 루게릭 병으로 생을 마감하기 전 집필한 것으로 17년 간의 수행과 이후 속세로 돌아오고 나서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내 손은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주먹 쥐어져 있나 아니면 활짝 펴져 있나. 아, 오늘도 생각해버렸다. '이 사람은 왜 이런 옷을 입고 회사에 오지?' 라고. 내가 다니는 회사는 복장이 자유로운 데다 대부분이 개발자라 옷의 스펙트럼이 꽤 넓다. 찢어진 스키니진에 야구 모자를 쓰고 다니는 사람도 있고, 깔끔한 면바지에 데님셔츠를 입고 다니는 사람도 있다. 무릎이 크게 찢어진 스키니진을 입고 온 사람을 지나치며 '왜 이런 옷을 입고 회사에 오나' 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이렇게 자주 습관적으로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해 버린다. 이것은 사람에만 국한되지 않고 일을 하는 방식이나 사고하는 방식 등에도 해당된다. '이건 이렇게 해야 되는데' 라던지 '이 사람은 왜 저렇게 하고 난리지' 라던지 하는 식이다.

이렇듯 우리는 생활에서 이전의 경험이나 지식에서 비롯하여 많은 결정과 판단을 내린다. 이미 안다고 생각하는 것에 사로잡혀 있으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여유도 없을 뿐더러 내가 생각하는 방식대로 진행되지 않는 것에 스트레스를 받는다. 비욘 나티코에 따르면 이런 경우 내 손은 주먹을 꽉 쥔 상태이다. 뭔가를 꽈악 그러쥐고 절대 놓지 않으려 매달리고 있는 것이다. 무언가에 매달린 사람은 그것 외에 다른 것에 신경쓸 겨를이 없다. 반면 우리가 손을 활짝 펴고 쥔 것을 내려놓는다면, 모래가 스르르 빠져나가고 난 자리에 빈 공간 만큼의 여유가 생기고, 우리는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라고 인정하고 상황을 다시 들여다 본다면 내면의 갈등도 다른 이와의 다툼도 현저히 줄어들지 않을까.


떠오르는 내 머리 속에 떠오르는 생각이라고 다 믿지 말라. 나는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내 머리 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의심해 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 같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부터 축적된 지식으로 최적화된 생각들을 한다고, 또 내 판단이 옳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많은 경우에 그것은 편향을 동반하는 것 같다. 경험에도 관성이 있어서 결국 내 삶이라는 바구니 속에서는 모양이 비슷한 경험들이 잔뜩 쌓여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전에 본 것 같은 맥락의 유튜브 영상들이 계속 추천되는 것처럼. 그리고 많은 경우 편향된 사고는 불합리한 결정을 내리게 한다. 나는 이제껏 얼마나 많은 순간 내 기준으로 사람과 사물을 판단 했던지, 편견으로 행동 했던지, 가치를 매겼던지, 또 얼마나 불필요한 불안과 불만이 있었던지... 그냥 인생 그 자체가 경험의 관성에 의해서만 움직였던 것만 같다. 이렇게 떠올려보니 내 머리 속에 떠오르는 생각이라고 다 믿으면 안 된다는 작가의 말이 이해된다. 사실 속으로 당장 이번 주에 해야 할 일들이 걱정되기 시작했는데, 내일은 또 내일의 내가 알아서 해결하겠지 라고 "내 머리 속의 불안" 또한 믿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한다.


17년간 수행한 수도승이 환속하자 그가 깨쳤다고 생각했던 깨달음도 결국 아무 소용이 없었다. 마흔 여섯이 된 비욘 나티코는 사원을 떠나기로 한다. 어디에선가 훅 불어온 바람 같이 어느 날 그렇게 숲속 승려가 되기로 정했을 때처럼 또 어느 날 그렇게 사원을 떠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그의 마음 속에 불어왔다. 앞서 환속한 전 승려들이 사원을 떠난 삶이 힘들 것이라고 했지만, 그 자신은 17년간 수행한 마음과 깨달음에 의지하여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환속과 동시에 그는 강한 불안에 휩싸인다. 그 불안이 너무 강해서 신체적 반응까지 나타날 정도로. 그에게 남은 것은 없었다. 그에게는 돈도 없고 직업도 없었으며 도무지 어떻게 살아나가야 할 지 계획을 세울 수가 없었다. 이런 구절이 있다.

사실 몹시 부끄러웠습니다. 저를 인간으로서 더 깊이 이해하고 계발하려고 인생의 절반을 바쳤습니다. 그렇다면 시간을 초월한 지혜의 빛을 가슴에 품고서 돌아왔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실상은 스웨덴에서 가장 불행하고 실패한 사람으로 전락한 것 같았습니다.

사실 나도 작가 본인처럼 그에게는 초월의 지혜가 있어 환속 후에도 문제 따윈 없을 거라 생각하며 책장을 넘겼다. 그러다가 그 역시 불안을 겪는 것을 보고 17년을 수행한 스님도 결국 꾸준히 노력하는 행자의 마음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에, 어떤 동질감과 위안을 느꼈다.

수행은 결국 다른 이의 관용에 기대는 것이다. 작가는 수행의 점진적인 진행에는 방향성이 있다고 한다. 그 방향성이란 불확실성을 최대한으로 높이는 것을 말한다. 식사는 탁발에 의해서만 행해지고, 수행 기간이 어느 정도 되는 승려는 화폐를 사용할 수도 없다. 그 때 그 때 탁발한 음식으로 끼니를 삼고, 음식이 없다면 그 날은 식사를 할 수 없고, 누군가 베풀어 주는 이가 없다면 의식주를 해결할 수 없다. 수행은 다시 말해 우리가 손에 꽉 붙들어쥔 삶에 대한 통제력, 기대 혹은 판단을 놓는 연습인 것이다. 그리고 그 연습은 결국 다른 이의 관용에 기댈 수 밖에 없다. 책에서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우리가 사는 우주는 모든 것이 임의로 이루어지는 차갑고 적대적인 곳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우리가 세상으로 내보내는 것은 결국 우리에게 고스란히 돌아오지요". 나에게서 나온 것이 나에게 돌아온다는 것을 알면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좀더 다정해지지 않을까.


책을 덮으며 내 삶의 에필로그도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 생각해 본다. 작가는 조용히 평화롭게, 어떤 두려움도 망설임도 없이 잠들었다.

죽음 뒤에 사라질 그 모든 것을 내려놓거나 적어도 살짝만 쥐고 살아가세요. 영원히 남을 것은 우리의 업이지요. 세상을 살아가기에도, 떠나기에도 좋은 업보만 남기길 바랍니다.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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