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미, 산수야
한데 저하께서는 태연히 내 이름을 부르시곤 어르듯 당부하셨다.
"내 언젠가 너에게도 그 얘기들을 모두 들려주마. 그러니 끝까지 잘 지켜보렴. 급할 것 없지 않느냐? 내가 떠난 후 놓친 이야기들은 네가 잘 기억해두었다가 나에게 전해주어야지."
떠난 혼을 붙잡는 것은 결국 살아남은 자들의 이기심이다. 하니 나는 그들이 오는 길에 한발 앞서 나가 흰 손수건을 흔들 생각이다. 그들이 돌아올 길을 마중하며.
최근 넷플릭스로 폭군의 셰프 라는 드라마를 보다가 문득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이 더해진 역사 소설을 읽고 싶어졌다. 그렇게 해서 읽기 시작한 소설이 「환혼전」 이다. 이야기는 연산군 다음으로 보위에 오른 중종의 재위 기간을 배경으로 하여, 세자와 한 명의 나인 그리고 궐 안에서 벌어지는 괴이한 소동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훗날 세자는 역사상 가장 짧은, 일 년이 채 되지 않는 재위 기간을 기록한 인종이 된다.
나는 국사 시간에 영 취미가 없는 학생이었다. 고등학생 때는 학교 수업 과정에 한국사가 포함되어 있어서 주당 몇 시간씩 수업을 들어야했고, 중간고사와 기말고사까지 쳐야 했다. 따라서 대부분의 친구들은 수능 과목으로 한국사를 선택했지만, 나는 그 대신 학교에서 수업해주지도 않는 다른 것을 골랐을 정도로 한국사와 친하지 않았다. 왜 내가 한국사를 좋아할 수 없었나 에 대해 돌이켜 보니 몇 가지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우선 연도별로 일어난 사건 외우기와 같이 논리적으로 추론할 수 없는 단순 숫자 암기가 힘들었고, 근현대사에 들어가서 나오는 수많은 인명과 그들의 행위를 매치 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그 중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공감할 수 없음' 이 아닐까 싶다.
조선 시대만 봐도 왕좌의 주인이 바뀌는 순간 숙청이 시작된다. 사화는 또 어떻고. 서로 죽고 죽이는 것만 해도 이해하기 어려운데 숙부가 조카를 죽이기도 한다. 법치사회에서 자란 나로서는 누군가를 쉽게 죽이는 것도, 애당초 누구를 해하고 싶을 정도로 강한 질투나 권력욕이 생긴다는 것 자체가 이해하기 어렵다. 결국 '공감할 수 없음==재미없음' 이 되어버린다.
그런데 이 책은 내가 공감할 수 있을 정도로 이야기를 발전시킨다. 여러 역사적 사건들을 기워주는 하나의 큰 이야기를 짜임새 있게 풀어내면서 맥락과 개연성을 더한다. 그러면서 각 장마다 실제 조선왕조실록 및 기타 사료에 기록된 역사적 사건들을 그대로 실어 사실성을 잃지 않는다. 이 책을 읽다보면 폐비 윤씨가 사사된 후에 왕비가 된 정현왕후도, 제안대군도, 살아있지만 살아 있지 않아야 했던 귀신처럼 떠돌아야만 했던 그 사람도, 세자도 정 나인도 어느새 공감할 수 있는 인물들로 다가온다.
작가의 상상력이라는 것은 참 대단해서 한국사 포기자였던 독자까지 역사가 이렇게 흥미로울 수도 있구나 라고 끝없는 공상의 세계를 펼치게 한다. 밥도 먹고 화장실도 가야하니 몇 번이나 아쉬워하며 책장을 잠시 덮어두어야 했지만 끝까지 쉼없이 읽고 싶을 정도로 드라마보다 재미있는 소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