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지금 캐나다에 살고 있어요. 제가 있는 이곳은 아침, 당신도 알다시피 전 아침잠이 많아 종종 허둥대며 하루를 시작하지만, 오늘은 모처럼 여유가 있네요. 오전에 일이 없는 금요일이라 아이를 학교에 등교시키고 나니 수업이 있을 점심시간까지는 온전히 제 시간입니다. 창 밖에 흩날리는 눈이 예뻐서 정성 들여 커피를 내리고 낮은 음악을 틀고 책을 읽으려고 앉았어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분위기, 이런 날엔 괜히 기분이 붕붕 떠올라 세상이 아름답고 존재만으로 감사해서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지만 글만은 쓰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너무 감상적이 되어 나중에 읽으면 얼굴이 달아오르도록 간지러울게 뻔하니까요.
책을 읽으려고 펼쳤는데 지난여름 책갈피에 끼워놓은 꽃 두 송이가 눈에 띄었습니다. 그렇다고 당신을 바로 떠올린 건 아니에요. 저는 땅에 떨어진 꽃이나 나뭇잎을 보면 그렇게 시들어 버리는 게 안타까워 책갈피에 끼워놓는 버릇이 있으니까요. 책을 읽으려고 펼쳤다가 우연히 말린 꽃잎을 발견할 때마다 당신을 떠올리며 살 순 없으니까요.
그저 말린 꽃잎이 예쁘다 생각했어요. 지난여름 화사했던 델피늄의 보랏빛이 이렇게라도 남아있어 감사하고 행복했습니다. 친구에게 사진을 보내 주었더니 답장이 왔어요. '내가 아는 그분도 이랬는데...... 종종 떨어진 꽃잎을 주어다 말려서 문 창호지에 붙여 주었어. 그러면 우리는 일 년 내내 화창한 여름인 거 마냥 그걸 보며 지냈어.'라고요. 툭. 떨어진 건 꽃잎인데 제 심장이 철렁했습니다.
당신은 늘 꽃을 좋아했지요. 제가 당신을 닮은 건지 '난 꽃 선물이 좋아. 그냥 선물은 아무나 받지만 꽃 선물은 사랑받는 사람만 받는 거야.'라고 했던 당신의 말을 들으며 자나라서 꽃을 좋아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그저 이 말을 제가 기억하고 있다는 걸 당신께 알려드리고 싶은 날인 것뿐입니다.
당신을 사랑했지만 미워하기도 했던 나는 엄마가 되고 난 후에야 종종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럴 기회가 있었으면 좋았겠다'라고. 그때 당신이 기뻤겠구나, 그때 당신이 아팠겠구나, 그때 당신은 힘들었던 거구나. 일상을 살다가 문득, 아이와 대화를 하다가 문득, 양말을 개다가 문득 철렁하고 심장을 한 대 맞은 것 같아질 때면 이제는 내가 당신을 조금은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었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합니다.
아세요? 벌써 2023년이에요. 올해를 맞이하며 유난히 많은 생각이 들었어요. 매년 그랬던 것과는 달리 쉽게 새해 계획을 세울 수가 없었습니다. 더 멋진 사람이 되기 위해, 더 많은 것을 가지기 위해 더 열심히 노력하겠노라 계획을 세우고 다짐하던 일들을 쉽게 할 수가 없었어요. 문득 삶은 그런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주 중요한 걸 놓치고 있는 느낌, 내게 만약 남겨진 삶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면 이렇게 살다가는 마지막 날 후회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지금까지 내 삶의 우선순위를 내 마음이 원하는 것들이 아닌 세상과 남들이 원하는 것들을 기준으로 판단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쩌면 삶의 비밀은 오늘처럼 '그럴 기회가 있었으면 좋았겠다'라고 생각한 그 순간에 있는 게 아닐까요? 말할 수 있었으면 좋았겠다, 해 볼 수 있었으면 좋았겠다, 더 사랑했었으면 좋았겠다...... 그런 순간들이요. 당신과 이야기할 수 있었다면 당신은 답을 알고 있었을까요?
생각해 보니 땅에 떨어진 꽃을 주워 책갈피에 끼우는 법을 알려준 사람도 당신이었어요. 그때 그 행동은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는 뜻이었다는 걸 이제 알았습니다. 내가 그걸 이제야 알았다는 걸 나는 이제 전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당신께 편지를 쓰고 싶은 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