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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크릿 세이 Oct 21. 2023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때

일단 잘 자고, 잘 먹자!

7월 28일 새벽 4시 

뚜벅뚜벅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졌다. 발소리의 주인이 나를 발견하지 못하도록 건물 모서리의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혹시라도 발소리의 주인이 나를 발견하면 어쩌나 두려워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이윽고 발소리의 주인공이 나타났다. 오른손에 날카롭고 커다란 낫을 들고 있는 백발노인이었다. 반대편 손에는 무엇이 들었는지 모를 까만색 비닐봉지를 무심하게 덜렁거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저 까만 비닐봉지에는 뭐가 들었을까? 저 날카로운 낫은 왜 들고 있는 거야? 그것보다 이 새벽에 뭐 하는 거지? 정신병자인가? 


순간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일어나는 살인사건 일화가 스쳐지나갔다.    

최근 혼자 순례 중이다 실종된 아시아계 미국인 여성이 5개월 만에 시신으로 발견되었으며, 피해 여성은 순례길 인근 주민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대체적으로 순례길 전역의 치안상태가 양호한 편이기는 하나 최근 들어 단순 도난이나 절도 외에 강도, 납치 시도 등 일부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주의가 요구.....

[산티아고 순례길 사건사고 유의 안내문] 주스페인대한민국대사관 2015.09.19




급격히 후회가 밀려왔다. 왜 이 새벽에 숙소를 나와서 이런 상황에 놓여있지. 아니, 그보다 전에 외국인 부부의 부탁을 착한 척 수락했던 일이 더 후회되어 어제 오후에 있었던 일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갔다. 


어제는 순례길을 걷기 시작하고 딱 5일째 되는 날이었다. 힘든 몸을 이끌고 숙소에 도착해서 짐을 정리하고 있을 때 노란 머리 외국인 여성이 기다렸다는 듯 말을 걸어왔다. 

“저 죄송하지만 침대를 좀 바꿔 주실 수 있을까요?”

남편과 함께 왔는데 서로 침대가 떨어져서 배정을 받았다는 것이다. 나에게 침대를 바꿔 줄 수 있겠냐는 정중한 부탁이었다. 풀어놓은 짐도 있어서 귀찮기는 했지만, 부부가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을 헤아려 승낙했다. 이층 침대가 10개가 들어가는 큰 방이었고 내가 옮기게 될 침대는 그 방에서 가장 구석진 곳에 있는 1층 침대였다. 햇빛이 들지 않는 그늘이 가득한 곳. 베드 버그가 살기에 가장 안성맞춤인 곳.


잠을 자기 위해 침대에 누웠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목 뒷덜미가 따끔거리는 것이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았다. 수세미 같은 스웨터를 맨살에 입었을 때처럼 불쾌한 느낌이었다. 베개 때문인가? 낮에 뜨거운 햇빛에 화상을 입었나? 설마 베드버그? 목이 따갑기도 하고 이런저런 잡생각에 잠들지 못하고 새벽 3시 로비로 나왔다.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가 갈 것 같아서 불을 켜지도 못하고 의자에 앉았다. 이번에는 의자와 맞닿은 허벅지가 따끔거렸다. 모기인가? 목이 따끔거려서 침대에 눕지도 못하고, 로비는 허벅지가 따끔거려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시간이 갈수록 따끔거림이 심해졌다. 


Bed bug(침대 벌레) 베드버그 한국말로 ‘빈대’다. 한국 속담에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다 태운다’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빈대는 박멸이 어렵고 한 번 물리면 가려움증이나 따가움이 굉장히 오래간다. 한국에서는 살충과 주거환경 개선으로 거의 찾아볼 수 없지만 해외, 특히 유럽에선 여전히 빈번하게 발견할 수 있다. 베드버그에 물려서 여행 내내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많다. 




새벽 4시 

밝고 거울이 있는 화장실에서 가려운 부분을 눈으로 확인했다. 허벅지 뒤쪽과 목덜미 뒤 부분이 오돌토돌 벌겋게 부어올라 있었다. 순간 베드버그가 생각났고, 심각성을 감지하고 나니 더 이상 숙소에 있을 수가 없었다. 함께 걸었던 프랑스 친구와 브라질 친구에게 미안했지만 새벽 4시에 그 친구들을 깨우는 것도 미안하고, 그렇다고 그 친구들이 깨어날 때까지 기다릴 자신도 없었다. 나는 곧장 짐을 챙겨 숙소 문을 열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일직선으로 쭉 뻗은 골목길을 앞에 두고 쉽사리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가로등 불빛과 바람에 흩날리는 쓰레기들이 스산하게 차가운 새벽의 분위기를 더했다. 70m 정도 되는 골목길을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빠져나왔다. 골목의 끝 그리고 마을의 끝자락에 우물을 둘러싼 작은 공터가 있었고, 그 공터를 지나면 이제 숲 속 길로 접어든다. 쉽사리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두운 숲 속 길, 새벽 4시, 여자 혼자 걷는다는 것은 용기가 아니라 위험 속으로 걸어가는 바보같이 행동이었다. 숲 속 길로 접어들지 않아도 충분히 지금 상황도 두렵고 위험했다. 


한 발짝도 떼지 못하고 건물 모서리가 만들어 놓은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앉아있었다. 한 시간쯤 흘렀을 때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남자들이 지나간다면 이대로 몸을 숨기고 있어야겠다 생각하며 신경을 곤두세우고 기다렸다. 다행히 순례길을 걷는 커플 순례자들이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들은 내가 가려고 하는 숲길로 들어섰다. 가는 방향이 나와 같았다. 서둘러 배낭을 짊어지고 그들을 뒤 쫓아가 말을 걸었다.

“저 실례합니다.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함께 걸어도 될까요? 혼자 걸으려고 하니 너무 어둡고 무서워서 출발을 못하고 있었어요.”

“네 물론이죠. 그렇게 하세요.” 


영어 발음이 독특한 헝가리안 커플이었다. 간단하게 현재 놓인 상황을 설명하고 그들의 뒤를 따라 걸었다. 걸으면서도 이들을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계속 그 자리에서 두려움에 떨며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중간에 낫을 들고 가던 노인을 지나쳤다. 헝가리안 커플은 노인을 보고 새벽부터 농사일을 하러 가는 듯하다고 했다. 그러든가 말든가 여전히 나는 낫을 든 백발노인을 보면 위협적이고 공포스럽다. 서서히 아침 해가 떠오르기 시작할 때쯤 다음 마을에 도착했다. 헝가리 커플은 아침식사와 마을 구경을 하기로 하고 나는 계속 걷기로 했다. 만나서 반가웠고, 고맙다는 인사를 끝으로 각자 선택한 길을 걸었다. 


어둠이 걷히고, 해가 떠올랐지만 칙칙한 먹구름 때문에 날씨는 여전히 흐리고 스산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새벽에 느꼈던 공포가 아직 곁에 머물러 있어 낯선 사람들의 시선이 불쾌하게 느껴졌다. 누가 쫓아오는 사람 없는지, 나에게 위협을 가하려는 사람은 없는지 자꾸 뒤를 돌아보며 확인하는 내가 있었다. 대도시에 사람은 많았지만 나는 혼자였고, 여전히 불안에 떨고 있었다.




베드버그에 물린 후 낮에는 걷는데 모든 신경이 집중되어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저녁에 잠을 자려고 하면 몸의 온도가 올라가서 가려움은 참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가려움에 뒤척이다 참을 설는 날이 하루 이틀 누적되었다. 숙면을 취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일주일이 지나 2차로 베드버그에 물렸다. 첫 번째 보다 2차 물림이 더 가렵고 상태도 심각했다. 

베드버그는 옮겨 다니는 특성이 있어서 베드 버그에 물린 사람 옆에는 가까이 가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내가 사람들에게 피를 줄까 봐 두려웠고, 사람들이 나를 피한다는 피해의식이 피로감을 더 했다. 걷느라 모든 체력은 소진되었고 피곤해서 옷 세탁이고 뭐고 손가락 하나 까딱하고 싶지 않고 기운도 없었다. 가려워서 잠을 못 자는 날이 지속되자 점점 피곤이 쌓이고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부정적인 생각과 걱정이 가득해서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존재가 되었다. 한국에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절실했다. 이 순례길을 계속 걸을 것인지 여기서 끝낼 것인지 결정을 하라고 내 안의 목소리가 다그쳤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순간 결정했다.


‘일단 잠을 자자’ 

‘자고 나서 생각하자. 내일은 일찍 출발하지 않아도 된다. 급할 것 없다. 우선 잠을 충분히 자자. 피곤할 때나 신경이 날카로울 때는 무슨 생각을 하더라도 부정적인 결론밖에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오늘은 맛있는 거 먹고, 잘 자자. 푹 자고, 내일 일어나서 생각하기로 하자.’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면서 계속 이층 침대가 있는 게스트하우스를 이용했었다. 그러나 오늘은 정말 잘 자는 것이 중요하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혼자 편하게 숙면을 취할 수 있는 호텔에 투숙하기로 결정했다. 매일 저녁 간단하게 먹던 샌드위치 말고, 오늘은 비싸고 맛있는 걸 먹을 생각이었다. 호텔에서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저녁을 먹으려고 거리로 나왔다. 혼자였다면 잡생각이 많이 났을 텐데 거리에서 안면이 있는 한국인 순례자들을 만났다. 저녁과 술을 곁들여 수다를 떨면 근심 걱정을 날려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호텔에서 투숙하고 휴식을 취했지만 이날도 잠을 설쳤다. 그러나 다음 날 정신과 몸의 컨디션은 꽤 좋았다. 잠을 설친 날이 하루 더 누적되었는데 어째서 컨디션은 좋아졌을까 생각해 봤다. 다음날 30km 이상을 걸어야 한다는 부담감도 내려놓고, 잠을 잘 자서 몸과 정신의 컨디션을 정상으로 되돌려 놓아야 한다는 압박감도 내려놓았었다. 어제와 오늘의 차이는 없었다. 그저 부담감을 잔뜩 짊어지거나, 부담감을 모두 내려놓거나 모두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질 뿐이었다.

나는 모든 걸 내려놓고 하루를 보냈다.  




정신이 맑아지자 또 모든 것이 분명하게 보였다. 선명한 감각.

나는 몸과 정신의 피로가 누적되었다. 잠을 못 자서 신경질적으로 예민해졌고 멘탈 붕괴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왔다. 이 순간은 내가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기 전에 예상했던 일이다. 그리고 이 순간을 기다렸다. 이렇게 힘든 순간이 오면 나는 배낭 무게 탓을 할 것이라 예상했고, 배낭의 무게를 줄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힘든 순간이 왔을 때 나는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독특한 선택을 했다. 


‘충분한 휴식을 취할 것’ 

모든 생각과 행동이 부정적일 때 가장 좋은 대처 방법은 하루 동안은 잠도 충분히 자고, 맛있는 것도 먹고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쉴 것.

나는 내가 가장 힘든 순간에 ‘휴식’이라는 방법을 선택하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러나 모든 걸 내려놓고 쉬는 충분한 휴식은 놀라울 정도로 좋은 결과를 이끌어 냈다. 나도 내가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결과가 말해주고 있었다. 건강한 육체와 정신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충분한 휴식은 상당히 지혜로운 선택이었다고 확신한다. 내가 결정한 선택이지만 정말 잘했고, 정말 현명하고 지혜로운 선택이었다. 이런 선택을 한 내가 대견하고 자랑스러웠다. 순례길이 아니더라도 멘탈이 붕괴될 때 자주 활용할 수 있는 간단하고 좋은 방법인 것 같았다.  


나는 지혜로운 선택 덕분에 맑아진 정신으로 오늘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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