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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크릿 세이 Oct 21. 2023

나는 무엇을 두려워하는 것일까?

불안의 정체도 모르면서 두려움에 덜덜 떨 수도 있다.

7월 16일 저녁 8시 프랑스 호텔.

따뜻한 물로 샤워 후 나는 3평 정도 되는 작은 호텔 룸을 둘러봤다. 하얀색 이불을 둘러 감은 침대는 주황빛 조명을 받아 더욱 포근하고 아늑해 보였다. 평온한 룸과 반대로 진정되지 않는 불안한 마음에 방안을 서성이다 테라스로 나가 답답한 마음을 달래 본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자 차가운 밤공기가 시원하게 어지러운 마음을 진정시켰다. 가로등 불빛 사이로 짙게 깔린 어둠이 복잡하게 뒤엉킨 생각들을 하나씩 흡수하듯 진정시키자 낮에 있었던 사건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불안을 일으키는 생각이 떠오르는 흐름을 막고 싶어 본능적으로 한국에 있는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따르릉~

“언니, 나 프랑스야.”

“잘 도착했어? 프랑스는 어때?”

“응 잘 도착했지. 그런데 언니 나 뭔가 이상해.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진정되지가 않아. 뭔가 불안하긴 한데 불안한 원인을 모르겠어.” 

“왜. 무슨 일 있었어?”

“응. 너무 많은 일이 있었어. 한국에서도 휴대폰 없으면 불편하잖아. 그런데 여기 프랑스에서 휴대폰이 고장 났다면 말 다 했지 뭐.”


사실 오늘 정해진 일정은 상당히 단순했다. 아침 7시 15분 프랑스 드골 공항에 도착했다. 순례길 출발지인 ‘생장피에드포흐’에 도착하기만 하면 된다. 

프랑스 드골 공항(7:15) -> 버스(2시간) ->기차역(4시간) -> 버스(2시간) -> 생장 도착

이동 시간을 넉넉하게 잡아 10시간 정도 걸린다고 하더라도 오후 5시 전에는 생장에 도착하게 될 것이다. 충분한 휴식을 취한 후 내일부터 순례길을 걷기만 하면 된다. 설령 무슨 일이 생긴다 해도 오늘 안에만 도착할 수 있다면 뭐든지 괜찮았다. 어렵지도 않고 복잡할 것도 없다. 프랑스어를 못해도, 가는 길을 몰라도 휴대폰을 이용해서 하나하나 해결해 나가면 될 일이었다.


프랑스어는 한마디도 못하고, 프랑스어로 된 안내판을 봐도 무슨 말인지 모르는데 여기서 휴대폰이 먹통인 거야. 휴대폰 유심칩을 교체해야 되는데 내가 그걸 할 줄 몰랐던 거지. 생각해 보면 예전에는 휴대폰 뒤에 뚜껑 열어서 유심칩 갈아 끼웠었는데 지금 휴대폰은 방수폰으로 만들어진 거야. 더 황당한 일은 휴대폰 사용 못 하는 게 너무 답답해서 억지로 휴대폰 뒷면 뚜껑을 뜯어 냈어. 그랬더니 코팅되어있던 유리 파편들이 우수수 떨어지는 거야. 아무것도 해결된 건 없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휴대폰은 망가졌지. 울고 싶어 지더라니까. 그나마 다행인 건 이제 더 이상 뒷면 뚜껑에 해결책이 없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서 뚜껑에 대한 집착 없어졌다는 것 정도. 다행히 기차역에 영어가 가능한 자원봉사자가 도움을 좀 받아서 9시간 만에 드디어 유심칩 교체했어. 


오후 4시가 다 돼서 기차표 예매를 하려니까 글쎄. 오늘이 금요일이라 기차표가 모두 매진됐다는 거야. 하, 기가 차서 뭐 이런 일이 다 있어. 더 기가 막힌 건 내일 기차표도 딱 1장 남았다고 하더라고.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시간이 부족했고 무조건 오늘 출발해야 된다는 생각에 버스 노선을 알아봤지. 인터넷 카페 회원들 도움을 받아서 드디어 버스표 티켓 결제를 하려고 하는데 결제가 안 되는 거야. 인터넷이 느려도 너무 느려서 그런지 계속 에러가 나는 거야. 인터넷으로 카드 결제하려면 입력해야 되는 것들도 많은데 그걸 다 다시 입력하기를 수십 번. 거짓말 안 보태고 100번은 더 입력한 거 같아. 정말 돌아버리는 줄 알았어. 아무리 결제 시도를 해도 결제는 안되고 에러만 뜨지 시간은 계속 흘러가지. 게다가 내가 예매하려고 했던 버스 출발시간은 다가오지. 계속 무언가에 쫓기듯이 일이 터지고, 해결하려고 노력하고, 해결은 잘 안 되고. 결국 지칠 대로 지쳐서 오늘 출발하는 건 포기하고 한 장 남은 내일 오전 9시 반 출발하는 기차표를 샀어. 


다 포기하고 문제를 해결하고 나니까 이젠 호텔 숙박비가 아까워지는 거야. 문제 하나를 해결하고 나서 또 다른 문제를 걱정해요. 인간이 참 간사해. 시간은 하루 버렸으니 돈이라도 좀 절약해 볼까 하는 마음에 기차역에서 하룻밤 노숙할까? 고민도 했거든. 그랬더니 그 이후에 벌어질 일들이 눈앞에 그려지듯이 선하게 펼쳐지는 거야. 혹시라도 노숙하다가 가방을 도둑 맞거나 불량배들을 만날지도 모른다 생각하니까 진짜 끔찍하더라. 게스트하우스에서 지낼까 했는데 오늘처럼 별의별 일이 다 벌어지는 날 누가 내 가방이나 물건들을 훔쳐 간다면 더 이상 제정신을 유지하는 것이 힘들 것 같았어. 멘탈은 이미 탈탈 털렸고 여기서 일이 더 커지면 못 견딜 것 같았거든. 그래서 오늘은 안전하고 평안하게 호텔을 잡자 생각했지. 그렇게 가까스로 정리하고 지금은 호텔인데 이런 게 오늘 계속 반복이야.”


“어휴, 고생이 많았구나. 그러게 옆에 친구라도 있으면 이럴 때 힘이 되고 좋았을 텐데….”

“힘이 되어주는 친구?”

‘힘이 되어주는 친구’라는 단어를 듣자 내면 깊숙한 곳에서 어떠한 외침이 들렸다. 너무나 또렷한 외침.

‘아니야. 언니. 내가 원했던 건 그게 아니야. 고통을 분담할 친구를 원했던 게 아니야. 내가 원했던 건 지금처럼 괴로운 상황이야. 오로지 나 혼자 괴로움과 고통을 만나는 거야. 난 최악의 고통을 경험하려고 여기에 온 거야.’




그 순간 생각 회로가 번뜩하고 방향을 틀었다.

“언니 미안, 내가 나중에 다시 전화할 게. 언니 덕분에 문제가 해결된 거 같아. 고마워 언니”

“어? 어 그래.”


나는 통화를 끝내고 노트와 펜을 꺼냈다. 내면에서 외치는 또렷한 외침을 상기시켜 조금 전 깨달음을 주었던 감각을 붙잡고 지금 느끼는 감각에 더 집중하며 생각을 이어갔다. 생각의 연장선에서 분명하고 선명하게 느껴지는 깨달음.


‘아아… 어리석게도 내가 타지에서 편안한 안정감을 얻으려 했구나.’ 

불안했던 원인이 밝혀지자 모든 걱정과 불안이 사르르 녹아내리고 그제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피하고 싶었던 두려움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순례길을 걸을 때 또 오늘 같은 일이 또 벌어 질까 봐. 감당 불가능한 트러블을 만나게 될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구나. 참 미련하다. 태어나고 자란 한국도 아닌 프랑스에서 말도 통하지 않는 타지에서 외국인들을 만나면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인데 말이다.


‘트러블아 내게로 와봐.’

트러블 너! 내가 해결하지 못할지도 몰라. 하지만 그래도 내가 너를 피하지 않고, 도망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봐줄게. 어떤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날지. 나에게 어떤 타격을 줄지 똑바로 지켜보고 바라봐 줄게. 앞으로 나에게 또 다른 문제들이 발생할지도 몰라. 그런데 나 이런 트러블 만나려고 여기 온 거야. 최악의 고통 속에서 내가 무언가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래서 나 여기 온 거야.  


너무나 분명하고 선명하게 알아차려졌다. 

불안의 원인이 무엇인지 내가 무엇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했는지, 내가 지금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는지 너무나 선명하게 알아차려졌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인가? 무엇이 이를 가능하게 하는가?


‘아아… 또 목표와 연결된 영혼이 나를 이끌어 주었구나.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또 나를 인도했구나.’


‘두려움을 직면한다는 것은 이런 것이구나.’

그래. 피하지 않고, 도망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두발 굳건히 디디고 똑바로 정면으로 마주하자. 

두려움은 피할수록 더 크고 무섭게 다가오는 법이다. 안전하고 평온하기를 바랐던 안일한 마음을 버리고, 위험을 감수하겠다. 두려움의 실체를 확인하고 나니 답답하고 불안했던 마음이 사라졌다. 그리고 불안했던 마음의 자리에 기대와 설렘이 자리 잡았다. 


‘앞으로 어떤 트러블을 만나게 될까?’ 그리고 트러블을 만나면 나는 또 어떤 것을 배우고, 얼마나 성장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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