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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크릿 세이 Oct 21. 2023

힘든 상황에서 어떻게 웃을 수 있어?

달콤한 감정적 고통

‘아. 힘들어 죽겠는데 누가 시끄럽게 떠드는 거야.’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기 시작하고 3주가 흘렀다. 12kg 배낭 무게와 하루 8시간 30km 걷는 것에 익숙해질 즈음 오전 11시. 숲 속 오솔길을 걷고 있을 때였다. 몇 미터 뒤에서 귀에 거슬리는 즐거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 호호 까르르, 소리의 근원지 확인을 위해 몸을 뒤로 돌렸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할아버지와 7살 정도 되어 보이는 남. 여 아이들이었고 그 뒤로 부부가 뒤따르고 있었다. 아마도 생김새로 보아 이탈리아인 가족인 듯싶었다. 다음 눈에 들어온 것은 그들의 가벼운 발걸음이었다. 그들은 무거운 배낭 대신한 손에 작은 손가방을 들고 룰루랄라 뛰기도 하고, 장난도 치며 길을 걷고 있었다. 그들은 나와는 사뭇 다른 형태로 나와 같은 길을 걷고 있었다.


‘저 사람들‘은 안 힘든가?’

왠지 모를 불쾌감을 느꼈다. 저들의 행복한 웃음소리가 귀에 거슬려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저들과 멀어지면 웃음소리를 안 들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걸음 속도를 높였다. 그런데 아무리 빨리 걸어도 발걸음이 가벼운 저들은 금세 내 뒤를 바짝 따라왔다. 내가 저들보다 빨리 간다는 건 어리석은 생각 같아서 차라리 더 느리게 걸었다. 무거운 가방을 메고 느리게 걸으니 점점 더 무겁게 느껴졌다. 최후의 방법으로 잠시 쉬었다 가기로 했다. 점심을 먹기에는 이른 시간이지만 편안히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도 없는 숲길이지만 저들과 멀어질 수만 있다면 이 짜증스러운 감정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어떤 것이라도 좋았다. 길을 벗어나 커다란 나무 그늘에 자리를 잡고 앉아 점심으로 준비한 복숭아와 사과를 먹기 시작했다. 과일을 먹는데도 짜증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휴식을 취하며 편안한 마음으로 무엇이 나를 짜증 나게 하는지 감정을 되짚어 보았다. 불쾌할 이유가 없는데 불쾌감을 느끼고 있었고 그 원인을 알 수 없어서 더욱 답답했다. 이상한 것은 저들은 나에게 어떠한 신체적 접촉도 없었고, 말도 섞지 않았으며, 심지어 저들은 나를 모르고 있다. 나 또한 저들을 모르는 상태에서 아무 연관도 없는 사람들에게 불편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휴식을 마치고 내 신체의 두 다리는 무성의하게 다시 걷기 시작했다. 나의 정신은 온통 그들과 나 사이에 있었던 불편한 감정 주위를 떠나지 못하고 이리저리 서성였다. 알 수 없는 의문을 붙들고 걷고 또 걸었다. ‘왜 불편하지?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한참을 생각에 잠겼다. 왜 나는 저들에게 불편함을 느끼는지 알 수 없었고, 이해할 수 없었다. 이 답답함을 속 시원하게 해결하고 싶었다.


‘이 불편한 마음이 무엇인지 해결해 보자!’

차라리 이번 순례길의 과제라 생각하자. 앞으로 남은 일주일 동안, 이 의문을 붙들고 고민해 보자. 지금 당장 해결하지 않아도 좋으니, 여유를 갖고 이 감정을 분석해 보자. 그렇게 나는 스스로 질문하고 답변하기를 반복했다. 길을 걸을 때도, 밥을 먹을 때도 사람들과 만나서 대화할 때도 문득문득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 생각의 균열을 메꾸려는 듯 질문과 답변을 번갈아 가며 핑퐁 게임을 했다.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저들, 저들을 보면서 불편한 감정을 받는 나, 나는 불쾌감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저들은 준 것이 없고, 저들을 보면서 불편한 감정을 느끼고 있는 나, 나는 저들이 불쾌감을 준 것으로 생각한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100km를 남겨 놓은 사리아를 기점으로 순례자들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가끔 한 두 명씩 보이던 순례자들이 한꺼번에 서른 명이 넘게 눈에 들어올 정도로 늘었다. 대부분 순례자들은 내가 메고 있는 배낭보다 부피가 작아 보였다.


불쑥불쑥 수시로 작게 찾아오던 짜증이 이번에는 강하게 느껴졌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짜증이란 말인가? 이렇게 짜증을 낸다고 무엇이 달라지는가? 내가 짜증을 낸다고 해서 세상이 더 좋은 방향으로 흐르는 것도 아니다. 내 속만 타들어 갈 뿐이고 내 속만 썩어 문드러질 뿐. 누구 하나 나의 이런 괴로워하는 모습을 거들떠보지 않는다. 그러할진 데 나는 이 쓸데없는 짜증을 왜 내고 있는가? 누가 좋아한다고? 내가 짜증을 낸다고 누구도 이득을 보는 사람이 없다. 그저 그것을 지켜보는 나 자신만 더 기분이 더러워질 뿐이다. 누워서 침 뱉기가 이런 느낌일까? 그저 나 혼자 내가 버린 더러운 오물을 뒤집어쓰는 것 같다. 오물을 보면 볼수록 오물은 더 역겨워지고 커진다.




내면의 목소리가 답답하다는 듯 말을 뱉어냈다.

“이쯤 되면 백해무익하니 그만 멈추는 것이 좋지 않겠어? 바보가 아니고서야 언제까지 이런 쓸데없는 짓을 지속하려는지. 너를 좀먹는 이 짓을 멈출 때도 되지 않았니?”


그래 그만 멈춰야 하겠지. 결국은 나와 세상에 이로울 것 하나 없는 짜증 내기는 여기서 멈추자. 누구에게도 이로울 것 하나 없고, 나 자신에게 해로운 것으로 결론을 내자. 판결 땅. 땅. 땅.


“결론은 그렇다고 치자. 그런데 너는 왜 여전히 짜증을 내는 건데?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건데?”


억지스럽게 끼워 넣은 톱니바퀴, 억지로 돌아가던 톱니바퀴가 어그러지며 삐걱거리는 이질적인 불쾌한 감각에 짜증이 폭발했다. 곧이어 억눌려 있던 속내가 쏟아져 나왔다.

‘이 길은 산티아고 순례길이잖아. 순례길에서 경솔하게 저러면 안 되지. 룰루랄라 웃고 떠들려고 왔어? 그러려고 이 길을 걷는 거야? 그건 아니지. 산티아고 순례자는 고행을 선택한 사람들인 거잖아. 고생길을 걸어야 순례자인 거잖아. 힘겨운 고행 안에서 내면의 자신과 대화하고 숙고하고, 성찰해서 깨달음을 얻어야 하는 거잖아. 그런데 저 사람들은 뭐야? 시끄럽게 웃고 떠들고 왜 저래? 이 숭고하고 위대한 순례길을 걷고 있는 순례자들에게 너무 민폐인 거 아니야? 순례자로서 마음가짐이 덜되어 있잖아.’


그 순간 내가 무의식적으로 가지고 있던 순례길의 의미를 알아차렸다.

아... 나에게 산티아고 순례길은 이런 의미구나. 순례길은 숭고하며, 고행해야 하고, 그 고행 안에서 진정한 나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 깨달음을 얻어야 하는 곳이구나. 나는 저들에게 나와 같은 의미를 가지고 나처럼 순례길을 걸으라고 외치고 있었구나. 나처럼 하지 않는 저들이 못마땅하여 분노하고 원망했었구나.


‘아아… 이 불편감은 내 것이었구나.’

나를 불편하게 하는 것은 저들이 아니라 나의 고정관념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구나. 나처럼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내가 옳다는 것이고, 내가 옳으니, 너희는 틀렸어. 그러니 나처럼 행동해야 해.라는 의도가 있는 불편함이었구나. 그래,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불쾌한 감정의 원인을 찾고 나니 마음에 평안이 찾아왔다. 순례길 과제를 완수한 것 같아 기쁨과 환희에 도취해 있을 때 불쑥 아직 해결되지 않은 불편함이 고개를 들었다.




‘그럼 행복해 보이는 가족은?’

행복해 보이는 이탈리아 가족은 순례길을 걷기가 무척 쉬워 보였다. 그들에게는 나와 같은 12kg 배낭 대신 2~3Kg 정도 되어 보이는 작은 손가방만 들려 있었다.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즐겁고 행복해 보였고 끊이지 않는 웃음소리가 나의 심기를 건드렸다.


‘저런 거 보면 나만 불편한가? 저 가족들은 행복해 보여. 남의 행복한 모습을 보면 나도 함께 행복감을 느끼거나 흐뭇한 표정을 짓지는 못할망정. 왜 나는 저들의 행복을 보고 괴로움을 느끼는 거지? 나는 행복한 사람들을 보면 못 견디는 파괴적인 사람인가? 사이코패스인가? 다른 사람의 행복을 보고 불행함을 느끼는 나는 악마일까?”


나를 더욱 이해할 수 없고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은 나의 모순적인 감정이었다.

나는 저들의 선택이, 저들이 하는 행동이 틀렸다고 생각하면서도 저들의 삶이 내가 선택한 것보다 훨씬 쉽고, 즐겁고, 행복해 보였다. 생각해 보면 저들처럼 쉽게 해결할 수 있는 것을 나만 어렵게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꼭 쉽게 사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내가 미련하게 고생을 사서 하는 것 같았다. 저들처럼 쉽게 해결할 방법이 있다면 그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 아닌가? 혼란스러운 감정 사이를 비집고 내면의 작은 목소리가 속삭였다.




“그럼, 너도 선택해 봐!”

‘어? 뭐라고?’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고행 속에서 내면의 자신과 대화를 시도하고 깨달음을 얻는 숭고한 순례길을 걸을 것인지, 아니면 저들처럼 쉽고, 즐겁고, 행복한 순례길을 걸을 것인지 선택해 봐.”


넌 어떤 것을 선택할래?


“지금 당장이라도 저들처럼 너도 할 수 있어. 어깨에 무겁게 메고 있는 12kg의 배낭을 버스로 이동시키고, 저들처럼 몸도 마음도 가볍게 순례길을 걸을 수 있어. 자 선택해!”

넌 어떤 것을 선택할 거야?”


‘어? 나도 선택할 수 있는 거야?’

그런 거였어? 그렇구나…. 나도 선택할 수 있는 거구나.

나는 내가 선택한 이 길이 전부인 줄 알았다. 내가 선택한 이 길밖에 없는 줄 알았다. 나도 둘 중에 선택할 수 있었는데 편협한 생각에 빠져 바보처럼 그것을 알지 못했다. 그때 서야 저들이 선택한 방법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나도 저들처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감히 생각하지도 못했던 방법, 내가 모르는지도 몰랐던 방법을 발견하고 난 후에야 나는 진정으로 나의 길을 선택할 수 있었다.


‘그래, 나도 저들과 같은 선택을 할 수 있어. 하지만 나는 저들처럼 배낭 없이 이 길을 걷지 않을 거야.

내 선택은 배낭을 메고 걷는 거야.’


지금 짊어지고 있는 이 12kg의 배낭 안에는 내가 살아가는 삶 속에서 내가 짊어지고 있는 무게의 짐이 들어있다. 나는 그 모든 무게와 함께 최악의 상황까지 나를 몰아붙여 볼 것이다. 그런 다음 확인하고 싶다. 살아가면서 맞이하게 되는 최악의 순간에 나는 무엇을 버릴 수 있고, 무엇을 버릴 수 없는지 확인하고 싶다. 순례길에서 최악의 순간이라 하면, 지금 걷는 이 길이 많이 힘든 상황일 것이다. 그리고 그 힘듦은 내가 짊어지고 있는 이 12kg의 배낭 때문일 것이다. 힘든 상황에서 나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나는 지금도 이 배낭이 무겁지만, 여전히 버리거나 포기하는 것 없이 모든 것을 짊어지고 걷고 있다. 얼마나 더 힘든 상황을 만나야 짊어진 배낭 안에서 무언가를 버리거나 포기한다고 생각하게 될까?


누군가는 미련하고, 어리석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무겁고 힘들더라도 12kg 배낭을 메고 고생하는 길을 걷겠다. 이 길밖에 없어서, 이 길밖에 몰라서 하는 선택이 아니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자유 속에서 나는 나의 길을 스스로 선택했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진정한 자유 안에서 하는 선택은 정말 자유로웠고 자유 그 자체였다.




스스로 선택하고 난 후부터 불편했던 감정이 사라졌다. 마음이 안정을 되찾고 난 후 그때 서야 이탈리아 가족들이 그대로 보이고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들도 그들 나름의 이유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홀로 여행하는 결정을 하는 데 긴 시간이 걸렸다. 그런데 연로하신 할아버지와 초등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자녀들을 데리고 산티아고 순례길을 선택한 그들에게는 또 어떤 사정이 있고 얼마나 많은 사연이 담겨 있을까? 온 가족이 함께 걷기 위해 그들은 배낭을 내려놔야 하지 않았을까? 어린 자녀들과 노인이 함께 걸어야 하는 그 길을 어떻게 무거운 배낭을 메고 걸을 수 있겠는가? 온 가족이 함께하는 것을 선택하고 그들은 배낭을 메고 고행하는 것은 포기하는 선택을 했다. 온 가족이 함께 산티아고 순례길을 하루 종일 걷는 것 또한 대단한 결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탈리아 가족들의 선택을 이해할 수 있었다.


다행히 스스로 부여한 과제를 순례길이 끝나기 전에 마칠 수 있었다. ‘내가 옳다. 그러니 나처럼 하라'는 생각이 나를 괴롭혔고, 갖고 있던 고정관념을 내려놓으니 그동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선택지들 사이에서 내가 원하는 삶을 향해 나아가는 방식을 스스로 선택했을 때 나는 자유로웠다. 내가 선택한 길에 대한 확신과 믿음의 불꽃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선택지가 하나밖에 없기에 어쩔 수 없이 하는 선택은 나에게 고통을 안겨주었다. 나와 다른 선택을 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는 답답함이 있었다. 사실 나와 다른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잘 살고 행복해하는 것이 부러웠던 것 같다. ‘부러우면 지는 거야.’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내가 누군가를 부러워하는 것을 인정하면 내 선택이 틀렸다고, 내 인생을, 내 존재를 부정당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게 싫어서 이 사실을 억압하고 부정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제까지 50%의 선택지만 가지고 살아왔던 것 같다. 이제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100% 자유로운 선택지 안에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을 것 같다. 또 다른 선택지를 발견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이탈리안 가족에게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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