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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크릿 세이 Oct 22. 2023

왜 이 길을 걷고 있는가?

달콤한 정신적 고통

순례길을 걸으면서 중간중간 찾아온 깨달음의 순간이 좋았다. 몰라서 애가 타고 답답했던 마음이 알고 난 후 속 시원하게 해결되는 상쾌함. 깨달음을 얻는 순간 느끼는 기쁨과 환희의 순간이 무척 좋았다. 또 환희를 느끼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아직 순례 일정이 끝나지 않았고, 앞으로 5일 정도는 더 걸어야 하니 시간은 충분했다. 그래서 이번엔 의도를 가지고 고민을 시도해 보자 결심했다. 이 지겨운 길, 그냥 걷기만 하면 뭐 할 것인가? 뭐라도 얻어가려면 생각이라도 해야지. 그래 생각을 해보자. 고민을 해보자. 


꽉 막힌 답답한 마음을 따라가면 내가 해결해야 할 문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순례길에 들어선 이후부터 풀리지 않고 답답하게 뇌리를 맴돌던 한 가지 의문을 붙잡고 해결해 보자.  

나는 왜 이 힘든 길을 걷고 있는가? 나는 왜 이 지겹고, 힘겹고, 고통스러운 이 길을 걷고 있는가? 도대체 왜! 이 길의 끝에 무엇이 있길래 이리도 서둘러서 가고 있는가?


답답한 도시에서 벗어나 신선한 자연의 새벽공기를 맞이하는 순례길의 아침이 좋았다. 그렇게 매일 자연의 아침이 주는 감사하고 특별한 기운과 함께 힘차게 하루를 시작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아름답고 경이로움을 자아내는 자연이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제는 저기 넓게 펼쳐진 평야는 더 이상 아름다운 풍경이 아니라 이제부터 내가 넘어야 할 걸림돌이 되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한없이 걷고 또 걷는다. 어디가 끝인지, 언제 끝이 날지 알 수 없는 이 길을 계속 걸어야 한다. 


다음 마을이 나오면 끝이 나려나. 다음 도착지까지만 힘내자. 아니, 아니야. 마을이 나오더라도 잠시 목을 축이고, 허기를 채우기 위한 휴식일뿐. 또다시 걸어야 한다.

앞을 봐도 순례자, 뒤를 봐도 순례자.

나는 왜 이 길을 걷고 있는가.

저들은 또 왜 이 길을 걷고 있는가.

우리는 왜 이 길을 걸어야 하는가. 

도대체 이 길의 끝에 무엇이 있길래 그토록 이 길을 걷고자 하는가. 




“그러게…. 거기에 뭐가 있길래? 목적지에 도착하면 뭐가 있어?” 내면 자아가 물었다.

이 길의 끝에는 산티아고가 있다. 이 길의 끝에 산티아고가 있다면, 인생의 끝에는 무엇이 있지? ‘죽음!’ 인생의 끝에는 죽음이 있다. 죽음과 산티아고…. 산티아고는 죽음의 종착역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죽으러 가고 있는 건데 왜 이렇게 열심히 서둘러 가고 있는 거지? 죽으러 가는 데 너무 열심히 가는 거 아닌가? 열심히 서둘러 가더라도 결국 죽음이라는 종착지는 모두 동일한 거 아닌가? 각자 언제 출발했고, 언제 도착하는지 다르듯이 언제 태어났고, 언제 죽을지만 다른 거잖아. 결국 태어나고 죽는 것은 모두 같은 거잖아. 죽음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것 같아. 죽음의 목적지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서두르고 있는 나를 보며 의문이 들었다. 나는 왜 죽음을 향해 이렇게 일찍 서둘러 가려는 것일까? 삶은 어차피 죽음을 향해 가고 있고, 목적지가 같다면, 서둘러서 가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인 것 같다. 왠지 죽음을 향해 너무 열심히 서둘러서 가고 있는 나 자신이 너무 어이없고 미련하고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도달하는 목적지는 동일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목적지에 도달할 것인가? 에 대해 더 숙고해 봐야 할 일이 아닌가? 이것이 더 중요한 질문 아닌가?


그렇다면 미련하지 않고, 한심하지 않은 삶이란 어떤 것일까?

최선을 다해 서둘러서 도착한 곳에 죽음뿐이라면 얼마나 허탈하고 허망할까. 나중에 죽음에 이르렀을 때 무엇이 가장 허탈하고 허망할까? 열심히 달려온 이 길의 끝에 ‘죽음’ 밖에 없다는 것이 가장 허망할 것 같다. 무언가 있을 줄 알고 미친 듯이 달려왔는데 고작 ‘죽음’이라니 이보다 더 허망한 것이 있을까?


그래. 그나마 다행이다. 이 길의 끝에 죽음이 있다는 것을 이제라도 알았으니. 지금부터라도 허망하거나 허탈하지 않을 후회 없는 길을 걸으면 된다. 




후회하지 않고 죽음에 이르는 길을 걸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 나… 조금 천천히 걷고 싶어. 천천히 여유를 가지고 걷고 싶어. 여기 있는 자연풍경은 지금 여기서만 느끼고 볼 수 있는 거잖아. 한국에 돌아가면 못 보는 풍경이잖아. 여기까지 와서 이 광활한 자연을 온전히 느끼지 못하고 가는 것은 정말 바보 같은 짓이야. 길가에 피어 있는 꽃 한 송이도 한국에서 볼 수 없고 지금 여기서만 볼 수 있는 거잖아. 여유롭게 자연을 가까이서 더 많이 만나고 느끼고 싶어. 또 지금 여기서만 가능한 것들이 있어. 순례자들을 만나는 거야. 여유를 가지고 순례자들, 사람들과 가까이하고 싶어. 


아아. 나는 삶에 더 가까이 다가가서 삶과 접촉된 삶을 살고 싶어 하는구나. 서둘러서 목적지만 향해서 달려가다가 놓치기 십상인 지금 여기에 집중된 삶을 살고 싶어 하는구나. 이것이 내가 원하는 삶이구나.


나는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 앞 뒤 좌우 하늘과 땅을 차례로 차근차근 눈에 담았다. 온몸으로 자연을 느꼈다. 초원에 자라고 있는 들풀과 들꽃들 피부에 와닿는 바람의 느낌과 귓가를 스치는 바람 소리, 바람에 섞여 코로 들어오는 들풀 향기, 길 위를 걸으며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고 있는 순례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여유를 가지고 지금 여기를 느끼는 충만감이 좋았다. 조금 더 이 감각을 느끼고 싶어 길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프랑스인 친구를 기다렸다. 친구에게도 내가 깨달은 것을 어서 빨리 알려주고 싶었다. 



“헤이 야닉! 여기 앉아서 잠시 쉬었다 가자.” 친구가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조금 전 있었던 깨달음을 들려주었다. 내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후 야닉이 말했다.


“우리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다시 태어나는 거야.”


‘아…. 다시 태어난다고 표현할 수도 있겠구나.’

조금 전까지 충만감에 넘쳐 빠르게 흐르던 사고가 그의 말 한마디에 급브레이크를 걸고 멈췄다. 죽음이라고 결론지었는데 내가 생각했던 것과 완전히 다른 관점이었다. 죽음 이후에 다시 태어나는 거니까 연결해서 보면 다시 태어난다는 말도 맞는 말이긴 하다. 

‘다시 태어난다라……….’

이미 태어나 살아가고 있는데 다시 태어나는 것이 가능한가?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일까?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어떤 감각일까? 이 길의 끝에서 경험할 수 있을까? 내가 경험을 할 수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경험해 보고 싶다는 소망을 안고 나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왼발. 왼발.

속으로 구령을 외치며 박자에 맞춰 앞으로 나아갔다. 이렇게라도 마음을 다잡지 않으면 걸음이 느려지고 정신력이 약해진 티가 났다. 거침없이 뜨거운 태양을 그대로 퍼붓는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이마를 타고 주르륵 흘러내리는 땀방울이 안구로 흘러들었다. 따가운 눈을 얼마나 비벼 댔는지 살갗이 쓸려서 쓰라렸다. 아무리 물을 마셔도 몸속의 모든 수분이 말라버릴 만큼 모두 땀으로 쏟아져 나왔다.


“지금 여기를 살아?” 

“개 풀 뜯어먹는 소리다. 힘들어 죽겠는데 지금 여기를 어떻게 살아? 그래. 좋은 말이야. 알아. 지금 여기를 살아야 하는 것은 알겠는데 그게 되겠냐고. 환경이 바뀌면 그에 따라 쉽게 변하는 게 사람 마음이야 “ 거침없는 속내가 쏟아져 나왔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걷는다. 앞으로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무겁다. 이 지루한 짓은 도대체 언제 끝나는지. 또 나는 이 지겨운 짓을 왜 하고 있는지. 나 스스로가 어이없고 한심하다. 멈추고 싶다. 나는 이렇게 힘든 걸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멈출 수 없다. 멈추고 싶지만, 멈출 수 없다는 것은 고통이다. 


나는 왜 이 길을 걷고 있는가?

고통스러운 길을 걷는 것은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것. 이대로 고통을 지속하는 것은 미련한 짓이다. 왜 이렇게 바보 같고, 미련한 짓을 계속하고 있는가? 왜 하는지 이유도 모르면서 지속하는 것, 멈추고 싶지만 멈출 수 없다는 것은 고통이다. 이 길이 괴롭고 고통스럽다면 멈추면 되지 않는가. 멈춘다는 것은 ‘포기한다’는 의미다. 이대로 한국으로 도망치면 현재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래 한국으로 되돌아가자. 

한국에 돌아가고 싶어도 지금 이 길 위에는 자동차가 다니지 않는다. 포기를 하더라도 준비 과정이 필요하다. 우선 교통수단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마을이 있는 곳까지 걸어가야 한다. 마을에 도착하면 한국으로 되돌아가는 항공권 티켓 일정을 조율하거나 남은 출국일 전까지 관광하는 방법도 있다. 


그렇게 한국에 돌아가면?

이전과 똑같은 일상이 이어지겠지. 나는 여전히 ‘포기와 실패에 익숙한 자’로 남을 것이고 힘들면 또 포기하겠지 그렇게 실패를 반복하겠지. 


또 실패자가 되라고? 또 포기하라고? 

싫어. 내가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데. 그 지긋지긋한 ‘포기가 습관인 나’라는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순례길을 걷기로 했던 거잖아. 이제 그만 습관이 되어 버린 포기를 멈추려고 여기 온 거잖아. 잘 생각해 봐. 내가 원했던 것이 바로 이런 고통. 이러한 번뇌와 괴로움이지 않았던가. 내가 원했던 것이 바로 지금처럼 고통 속에서 지금처럼 고뇌하는 거잖아.


아….. 맞다. 나 이런 고통을 원했던 거지. 이 고생, 이 괴로움, 이 고뇌… 내가 원했던 거구나. 머릿속에서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난 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게 바로 내가 그토록 원했던 고뇌의 순간이구나.”

바로, 지금, 이 순간, 내가 원했던 것이 이루어지는 중이구나.  




그런데 지금까지 왜 나는 불평불만을 늘어놓고 있었을까?

나의 행동을, 나의 감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모순적인 상황이 혼란스러웠다. 지금처럼 만족할 법한 상황에서 불평불만을 쏟아내던 과거의 순간들이 펼쳐졌다. 


예전부터 그랬다. 나는 대단해 보이는 사람을 부러워했다. 내가 영어를 못했을 때 영어를 잘하는 사람을 보면 존경스럽고 부러웠다. 4년 전 호주에서 워킹홀리데이로 2년을 머물다 와서 생활영어를 어느 정도 할 수 있게 되자 ‘뭐 별거 아니네. 뭐 이런 걸 가지고, 호들갑이야.’라고 생각했다. 내가 이루기 전에는 대단해 보이던 것들이 내가 이루고 나면 한순간에 하찮게 변했다. 내가 성취한 그 결과를 즐기지 못하고, 만족하지 못하고 기뻐하지 못하고. 행복해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 미련하고 어리석게 느껴졌다. 왜 나는 이런 어리석은 행동을 반복하는 것일까? 

왜 나는 만족을 하지 못하는가? 

왜 나는 만족을 하지 못하는가?


지금도 마찬가지다. 내가 그토록 원했던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있으면서 왜 나는 이 길을 즐기지 못하는 것일까? 왜 나는 만족을 못 하는 것일까? 내 성격이 괴팍한가? 내 성격에 문제가 있나? 나는 왜 기쁘거나 행복하지 않지? 왜 다른 사람들처럼 기쁨을 누리지 못하지? 왜 자꾸 내가 이루지 못한 것이 더 크게 보이고, 더 좋아 보이고, 나보다 앞서가는 사람, 나보다 더 많은 것을 성취한 사람들을 부러워하는 것일까? 나는 왜 항상 나보다 먼저 간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그들과 나를 비교하고 있을까?  나는 평생을 이렇게 남과 비교하고, 남들을 부러워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걸까? 


왜 나는 만족이라는 것을 모르고 사는 걸까? 언제까지 비교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까? 도대체 나의 만족, 나의 행복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나는 언제쯤 만족한 삶을 살 수 있을까?


끊이지 않고 계속 비슷한 의문이 떠올랐다. 질문은 돌고 돌아 현재의 고통으로 되돌아왔다. 미로 속에 갇혀 계속 같은 곳을 뱅글뱅글 돌고 있는 것 같았다. 나도 나 자신을 이해할 수 없어 답답해하고 있을 때 내면 자아가 말을 걸었다.


“너는 언제까지 그렇게 살 거니? 평생 그렇게 불평불만만 하면서 살아갈래?”

그러게. 나는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할까. 나도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은데...

“아니 이 답답아. 도대체 언제 알아차릴 거야. 이 길도 다 끝나가는데 이제 알아차릴 때도 된 거 아니야?”

뭘 알아차려?

“너, 여기 왜 있어. 이 순례길에 왜 있냐고. 누가 너 여기 가라고 등 떠밀었어? 누가 너 여기 안 가면 죽인다고 협박했어? 너 도대체 여기 왜 있는 거야?”

그거야. 당연히 내가 여기 오고 싶었으니까…. 내가… 내가….. 원했으니까. 




아아.. 그렇구나. 내가 지금 이 길 위에 서 있는 이유. 이 길을 걷고 있는 이유는… 내가 원했기 때문이구나. 두 달 전부터 나는 이 길을 걷기 위한 노력을 했구나. 퇴사하고, 정보를 수집하고, 필요 물품을 사고, 비행기 티켓을 구매하고 한국을 떠나온 모든 이유가 지금 여기에서 이 길을 걷기 위해서였구나. 이 길은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이 산티아고 순례길은 내가 그토록 원했던 것이다. 내가 그토록 원하고 갈망했기에 나는 이 길을 걷고 있다. 그렇다. 지금 현재는 내가 원하던 것이 이루어진 상태다. 나는 내가 꿈에 그리던 꿈과 희망의 길 위를 현재 걷고 있다. 이 길이 내가 원했던 바로 그것이다. 

지금 현재는 내가 원했던 모든 것이 이루어진 상태다. 

지금 이 순간은 내가 원했던 것이 이루어진 순간이다. 

지금 이 순간은 내가 원했던 것이 이루어진 순간이다. 

지금 이 순간은 두 달 전 내가 원했던 것이 이루어진 순간이구나. 

지금 이 순간은 내가 원했던 것이 이루어진 바로 그 순간이구나.

아아, 지금 이 순간은 내가 원했던 것이 이루어진 바로 그 순간이구나.

아아,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갈망하던 내일이구나.

명치에 걸려있던 답답한 기운이 스르륵 녹아내렸다.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진동했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기쁨과 충만감이 넘쳐흘렀다. 




나의 고통 원인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선명하게 알아차려지는 깨달음.

‘꿈’은 목적지에 도달하면 끝이 난다. 목적지에 도착한 순간부터 ‘현실’은 시작이다. 나의 꿈은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것이었다. 지금 이 길을 걷고 있으니 꿈은 이루어졌다. 걸으면서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은 현실이다 


아아… 지금과 똑같구나. 원하는 것이 이루어진 순간이 지금과 너무도 닮았다. 지금도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진 상태다. 나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기를 원했다. 원하는 것이 이루어져서 좋은 것은 딱 순례길을 시작하는 순간까지다. 순례길을 걸으면서 고통의 연속이다. 나는 지금 괴롭다. 순례길을 걷는 것이 괴롭다. 그리고 이 괴로움은 현실이다.


나의 고통 원인은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진 이후. 그 이후에 마주하게 될 괴로움과 고통을 상상하지 않았다.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고통을 마주하는 순간 좋은 것은 받아들이고 괴로운 것은 받아들이지 못했구나. 그러면서 괴로운 것은 내가 원했던 것이 아니라고 부정하고 회피하고 괴로움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어 했구나. 자연의 순리대로 너무나 당연하게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나는 것인데 외면하고, 기피하고, 회피하고 싶어 했구나.


목표를 정해 놓고 목표만 향해서 달려 나갔다. 목표지점에 도달하면 모든 것이 끝나는 줄 알았다. 모든 것이 해결될 줄 알았다.  ‘그냥 그곳에 도달하면 어떻게든 되겠지. 그곳에 도착만 하면 마법처럼 모든 것이 해결될 거야’ 안일했구나. 목적지에 도달하기만 하면 세상의 모든 근심 걱정이 사라지길 바랐구나. 허황된 꿈을 꾸고 있었구나. 그러나 실상은 목표지점에 도착한 이후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마치 산티아고 순례길처럼. 목표지점에 도달한 이후를 예상하지 못했던 고통스러운 순간들이 펼쳐지는 것처럼. 괴롭고 고통스러운 상황을 마주칠 때마다 ‘내가 원했던 건 이런 게 아니야’라며 부정하며 나쁜 것, 안 좋은 것, 힘든 것, 불쾌감을 일으키는 결과를 만나면 내가 선택한 길을 부정하고 후회했구나.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이렇게 내가 원하는 것이 모두 이루어지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만약 내가 원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다면…. 그건 그거대로 원하는 것이 없는 현실이 이루어지겠구나. 만약 내가 산티아고 순례길을 원하지 않았다면 내가 순례길을 걸을 일은 없었겠지. 원하는 것이 있는 현실과 원하는 것이 없는 현실이 분명하게 구분되자 이를 증명하는 듯한 영상이 눈앞에 펼쳐졌다.




바다 위에 뗏목 하나가 표류하고 있었다. 뗏목은 출렁이는 바다의 파도에 이리 치이고 저리 휩쓸려 바다 한가운데 두둥실 떠 있다. 뗏목은 지금, 이 순간이 당혹스럽다. 여기가 어디인지, 자신이 왜 여기 있는지 알 수 없으니 더 답답할 노릇이다. 도대체 왜?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 못 되었길래? 지금 여기서 이런 당혹스러움을 감당해야 하는가? 혼란에 빠지는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또 분노하고 화를 내겠지 ‘이건 내가 원했던 것이 아니야’라며.


내가 무언가 원하지 않는다면 내 삶에서 급격한 변화 없이 지금과 비슷한 삶을 살겠구나. 인생의 공식처럼 조금씩 그렇게 이어지겠구나. 앞으로 펼쳐질 나의 미래가 불 보듯 훤하고 분명하게 그려졌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지금과 같은 삶이 계속 유지되는 것을 원하냐는 것이다. 나는 별다른 변화 없이 지금의 삶이 계속 유지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직장에서 매일 하루 8시간씩 회사에서 기계의 부속품인 것처럼 허망하고 허무한 삶을 살아가고 싶지 않다. 침대에 누워서 뒹굴거리며 미래를 걱정하며 세월을 흘려보내고 싶지 않다.


내가 산티아고 순례길에 오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면 나는 순례길 위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나는 순례길 위에 있다. 내가 무언가 간절히 원한다는 것은 내 인생의 갈림길을 나 스스로 주도적이고 능동적으로 노력해 만들어 내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은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진 상태다. 지금 이대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 지금, 이 순간은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진 상태다. 지금 이 길 위에 두 발로 서기 위해 나는 지금까지 노력했다. 이 순간은 과거와 미래의 접점이다. 나는 앞으로 3일 후 미래에 ‘산티아고’에 도착하기를 원하고 있고 열심히 걸어가는 중이다. ‘현재’는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진 바로 그 순간이며, 이 길과 연결된 곳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 위에 서 있다. 지금 원하는 것이 3일 뒤 현실로 이루어질 것이다.


내가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있는 것은, 

내가 그토록 원하던 것이 이루어진 상태다.

비록, 걷고 있는 이 길이 지루하고, 힘겨울지라도


내가 글을 쓰고 있는 것은

내가 그토록 원하던 글 쓰는 것이 이루어진 상태다. 

비록, 글이 생각만큼 잘 써지지 않고, 써진 글이 마음에 안 들지라도


내가 회사에 다니고 있는 것은

내가 그토록 원하던 회사 입사가 이루어진 상태다.

비록, 회사 생활이 업무 압박이나 인간관계 때문에 괴롭고 힘들지도


내가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내가 그토록 원하던 생이 이루어진 상태다.

비록, 인생이 괴롭고, 힘들지라도


내가 지금 무언가 하고 있는 것은

내가 그토록 원하던 것이 이루어진 상태다.                                        

비록, 그것이 허무하고, 지루하고, 고통스러울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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