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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크릿 세이 Oct 22. 2023

왜 이 삶을 살아 가는가?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달콤한 영적 고통

‘지금, 이 순간은 내가 원하는 것이 모두 이루어진 상태다.’ 


깨달음 이후 눈앞에 다른 차원의 문이 열렸다. 지금의 깨달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영상으로 비춰 나타났다. 과거로 이동하는 듯하더니 그보다 더 이전의 과거로 더욱 빠르게 빨려 들어갔다. 시공간을 초월한 과거로 거슬러 어떤 공간에 이르자 빠르게 흘러가던 생각이 멈췄다. 서서히 그곳이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곳은 포근하고 따사로운 푸른 초원이었다. 주변은 온통 연녹색 잔디가 깔려 있었고 잔디 이외에 파란 하늘뿐이었다. 하늘과 비옥한 땅 그리고 따사로운 햇살뿐이었다. 비옥한 땅은 온통 연녹색 잔디로 채워져 있었고, 살랑이는 바람이 불 때마다 휘어지는 잔디 풀잎이 햇살에 반사되어 눈이 부셨다. 모든 것이 따사롭고 포근하고 평화로운 봄 햇살을 머금은 공간이었다. 


그곳에는 어떠한 생명체도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없는 듯 보였고, 그렇게 믿었다. 그러나 공간에 익숙해지자. 그곳에는 인간의 감각 기관으로는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는 존재들이 있었다. 생명체는 아니지만 분명 무언가 존재한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인식하기 위해 인간의 모든 감각을 멈추고, 무엇인지 모를 것에 직감적으로 집중하기 시작했다. 모든 감각이 잦아드는 것과 동시에 서서히 그들의 흐름이 감지되기 시작했다. 


감지되는 흐름을 따라가자, 어디선가 아이들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까르르까르르 웃음소리에 집중하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은 줄 알았던 주변이 수증기처럼 작은 입자들로 채워져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작은 입자들은 공기 방울 크기로 확대되어 하나둘씩 형태가 드러나 보이기 시작했다. 공기 방울 안에는 신이 나서 눈이 반달로 접히고 입을 크게 벌리며 웃는 아이의 표정이 보였다. 그들은 주먹만 한 크기의 공기 방울 속에 천방지축 뛰어노는 개구쟁이 아이들 같은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에게 멈춤이나 쉼이라는 의미는 없다는 듯 까르르까르르 웃으며 활발하고 역동적으로 움직였다. 나도 둥글고 투명한 공기 방울 안에서 보호되어 마치 탱탱볼이 된 듯 공중에서 통통 퉁겨지고 있었다. 공기 방울 안에서 안전하게 보호받으며 그들의 움직임을 지켜봤다. 




그들을 좀 더 자세히 관찰하기 위해 집중력을 높이자, 그들이 하는 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서로 대화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로지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일방적으로 단 하나의 생각만 했다. 

‘따뜻한 것을 원해’

‘포근한 것을 원해’

‘자유로운 것을 원해’

그들은 마치 자석처럼 비슷한 것을 원하는 것들끼리 서로 끌어당기며 모여들었다. 그들이 점점 많이 모여들자, 그들에게 변화가 생겼다. 마치 공기 중에 있던 수증기가 모여 구름 떼를 형성한 후 비가 내리듯 서서히 변이를 일으켰다.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에서 서서히 물질화되어갔다. 의지들이 모이자 각기 다른 종류들로 변화되었다. 구속됨 없이 무한한 자유를 원하는 에너지들은 바람이 되었다. 구름, 나무, 꽃, 흙, 곤충, 동물이 되어 지구라는 물질세계에 자리 잡았다. 그들의 의지가 모여 지구라는 물질세계의 모든 것을 만들었다. 


이들은 의지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중 호기심 많은 의지가 모여 예쁘고 아름다운 꽃을 발견했다. 아름답고 연약한 꽃이 다칠까 꽃을 다른 곳으로 이동시켜 주고 싶은 의지들이 꽃을 이동시키려고 노력했지만, 그 노력은 공기처럼 꽃을 통과해 버렸다. 바람처럼 꽃을 흔들 수는 있지만 잡을 수는 없었다. 비가 되어 꽃을 건드릴 수는 있지만 이동시킬 수 없었다. 서로 자신이 강하다고 뽐내는 많은 의지가 모여들었지만, 의지만으로 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의지는 염력처럼 강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지만 물질계에 영향을 미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동물들은 물질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지만, 의지보다는 본능이 너무 강했다. 살고자 하는 본능을 실현하기 위한 의지는 강했지만, 살아가는 것과 무관한 의지를 실현할 수는 없었다. 본능을 이겨내고, 의지를 이용해 원하는 것을 실현할 수 있는 존재를 원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의지를 물질세계에 발현시킬 수 있는 물질적인 힘을 원했다. 의지 세계와 물질세계를 연결할 수 있는 존재. 물질과 같은 종류의 것이 되어 의지를 물질세계에 실현할 수 있는 의지를 가졌지만, 자유로운 물질적 존재를 원했다.


의지들은 원했다. 그들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는, 그들의 의지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 낼 수 있는, 그들의 의지가 현실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물질화되고 실.체.화된 존. 재

의지체들은 실체화가 아니다. 그들은 정신체이고 에너지체다. 그들은 의지체들과 고스란히 연결되어 있으면서 실체화된 존재를 원했다. 그래야만 그들이 원하는 것을 이루어 낼 수 있다. 그들의 의지대로 통제가 가능하다. 의지체들과 연결이 끊어져 있어도 안 되고, 의지체들만 존재해도 안 된다. 의지체들과 실체화가 동시에 존재해야 한다. 멈춰 있는 존재는 안된다. 돌덩이는 한번 멈추면 너무 오랜 세월을 그대로 있어야 한다.


기적이 이루어지듯 의지체들이 그토록 갈망하던 인간의 신체를 갖게 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인간의 신체는 의지를 실현하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리 강한 의지가 있더라도 신체가 없으면 인간이 살아가는 지구라는 물질세계에서 의지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심지어 책상 위에 놓인 물컵을 1cm 옆으로 옮기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책상 위에 놓인 물 컵을 자신의 의지로 옮기는 이 간단한 행위의 위대함.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무엇이든 가능한 정신과 무엇이든 가능한 인간의 신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간단하고 위대한 사실을 깨닫기 위해 나는 지금 ‘인간 탄생설’의 시간여행을 다녀왔다. 




아아, 내가 인간으로 태어난 이유를 알았다.

아아, 의지체들은 자유로운 인간의 몸을 원했구나.

내가 인간으로 태어난 이유는 오랜 과거에서부터 의지체들이 원했기 때문이다. 의지체 수천억이 모여 있는 한 덩어리가 되었다. 한 덩어리 안에는 수천억이 넘는 의지들이 각자 원하는 의지들이 담겨있다. 그러나 그 목적은 비슷하기 때문에 자석처럼 모여들어 한 덩어리를 이루어 붙어 있을 수 있다. 그들이 원했던 결과물이 인간이라는 형태로 탄생했다. 그 인간은 의지 세계(정신세계)와 물질세계를 연결하는 매개체 역할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아주 오래전 태초부터 의지체들은 인간의 육체를 갈망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자 많은 것이 다르게 다가온다. 그들이라면 이제 무엇을 하고 싶을까? 무엇을 위해 이리도 인간의 육체를 갈망했을까? 이제 그들의 갈망은 나의 것이 되었다. 과거 그들이 원했던 것이 현재의 내가 되었다. 




나의 삶의 의미와 목적이 명확하게 밝혀졌다. ‘무엇이든 경험해 보기‘로 결정한다.

경험의 종류는 무한하다. 인간의 감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경험해 볼 것이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세계, 각 나라의 문화, 자연, 산, 들, 바람, 꽃들을 알아갈 것이다. 인간으로 태어나 살아 숨 쉬고 있기에 느낄 수 있는 감정, 기쁨, 슬픔, 사랑, 외로움, 고통, 분노, 좌절, 자책이라는 감정을 경험해 볼 것이다. 또 음악가가 되어 바라보는 세상, 작가가 되어 바라보는 세상, 건축가가 되어 바라보는 세상은 건축물 자체가 예술이지 않을까? 사람을 위해 사람을 관찰하고 그들의 동선과 시선을 생각하면서 건축으로 사람과 소통하는 삶..... 나는 이 모든 것을 경험하기 위해 살아가기를 희망한다.     


여기서 세상의 진실과 거짓을 가리는 지혜가 발현된다. 

거짓은 현재는 자신이 원하는 삶이 아니라고 부정하며, 자기 삶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이렇게 변명한다고 해서 바뀌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지속적인 변명은 현재 삶을 그대로 유지하겠다는 발악에 불과하다. 또다시 ‘지금 현재’의 유지하기를 바라며 ‘지금 현재’의 삶을 지속하겠다는 의지이고, 그 의지는 이루어질 것이다. 

진실은 ‘지금 현재’는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이 이루어진 최상의 상태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지금 현재’는 모든 것이 완벽한 상태다. 그러니 이 상황을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 고민해야 한다. 자신이 원하는 미래를 선택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지금 노력을 이어 간다면 이것이 곧 자신의 과거가 될 것이다. 이 과거는 자신이 원하는 ‘지금 현재’를 이루고 있는 밑거름이다. 


너무도 당연한 진실을 이제까지 외면하고 부정하며 살았다. 진실 외면과 부정은 거짓된 사실을 만들어 냈고, 거짓으로 만든 세상 안에 갇혀 지냈다. 진실의 눈을 닫고 거짓의 눈을 뜨고 살았던 것이다. 이제 거짓의 눈을 감고 진실의 눈을 떴다. 너무도 많은 시간을 거짓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진실의 눈을 뜨고 살아갈 수 있는 지금이 지혜롭고 현명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혜는 그저 단순하게 진실을 보는 것뿐인데 말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로 태어난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이것은 마치 현대 사회에서 경제적 자유를 위해 돈을 갈망했고, 돈을 무한하게 얻어 경제적 제약에서 벗어난 것과 같다. 지금까지 자신을 옭아매던 경제적 제약에서 벗어나 모든 것을 얻은 지금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과 같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이미 나를 이루고 있는 의지가 말해주고 있다. 인간으로서 무엇이든 가능한 삶을 실현하고자 하는 의지체들이 모여 인간이 되었다. 물질세계의 인간이 되어 스스로 자유로이 무언가 해보는 것. 그들의 의지로 세상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 그것이 무엇이든 그들은 어떠한 영향력을 원했다. 태초부터 서서히 강력한 힘을 갖게 된 그들은 물질세계에서 그들의 의지를 실현하고 싶어 했다. 무엇이 되었든 자신들의 의지를 실현할 수 있도록 정신세계의 의지를 받아들여 물질세계에 전달할 수 있도록 선택된 것이 인간의 육체다. 


과거의 내가 원했던 것이 현재 지금 나의 형태를 만들었다. 현재 지금 나의 형태란 내가 처해있는 환경, 나의 성격, 나의 능력, 나의 재능, 나의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을 말한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말도 안 돼. 이런 상태를 나는 원하지 않았어.” 


나의 경우를 얘기한다면, 나는 책을 읽는 지적인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책을 펼치면 지루하고 재미없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하얀 건 종이요. 까만 건 글자로 되어있는 책을 펼치는데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말이다. 책은 덮어버리고 누워서 뒹굴뒹굴. 손에 쥐어져 있는 건 TV리모컨이거나 휴대폰이었다. 분명 나는 책을 읽는 지적인 사람이 되는 것을 원했다. 그러나 그보다 내가 더 원했던 것은 책 읽는 지루함을 피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나의 모든 행위는 책의 지루함을 회피하는 모든 행동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것이 내가 원했던 삶이다.    


이것을 현실주의 칼 로저스는 이상적 자아와 현실적 자아로 구분했다. 나의 이상적 자아는 ‘책 읽는 지적인 사람’이고, 현실적 자아는 ‘손에는 TV리모컨이나 휴대폰을 가지고 누워서 뒹굴뒹굴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상적 자아와 현실적 차이가 크기와 스트레스의 크기도 비례한다.



또 다른 예를 들면 나는 수영을 못하기 때문에 수영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수영강습을 신청하고 수영 연습을 시도했다. 처음 시작은 물속에 들어가서 노는 기분으로 즐기면서 했다. 그런데 물에 뜰 수 있도록 사용하던 보조도구를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맨몸으로 자유 수영을 시도하자 몸이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잘못해서 코로 물이 들어가면 코가 맵고 머리는 띵하게 아팠다. 고통이 시작되자 나는 한 달 만에 수영하는 것을 그만뒀다. 수영을 잘하는 사람이 되는 것보다 더 내가 원하는 것은 수영할 때 받는 고통을 피하는 것이었다. 나의 이상적 자아는 ‘인어공주처럼 수영을 잘하는 사람’이고, 현실적 자아는 ‘수영도 못하는 맥주병에 수영할 때마다 물먹어서 괴롭고 고통스러운 사람’이었다.


마지막으로 최근 사건을 예로 들어보자. 나는 ‘산티아고 순례길’ 관련 책 출간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글을 쓰던 사람도 아니고 문학을 전공한 적도 없었다. 글을 쓰려는 시도할 때마다 내가 작문 실력이 부족하고 어설프다는 것을 계속 마주해야 했고 나는 그 상황이 괴로웠다. 글 쓰는 것이 괴로워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었다. 책을 출간하는 것보다 더 내가 원했던 것은 글을 쓸 때 마주하는 괴로움과 고통을 피는 것이었다. 나의 이상적 자아는 ‘책을 출간한 사람’이고, 현실적 자아는 ‘작문 실력이 형편없는 사람’이다.


결과론적으로 현재의 상태 즉 인간으로 태어난 것은 태초부터 존재한 나의 의지체들이 원했던 것이 이루어진 상태이다. 현재 상태에 한탄하거나 불만을 토로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왜? 현 상태가 곧 내가 원하는 것이 이미 이루어진 상태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현재 상태를 원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현재의 가난과 현재의 무지와 현재의 무력감을 자신이 원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래 자신이 이 모든 것을 원하지 않았다고 치자. 자신이 그것을 진정으로 원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나는 내가 원하지 않는 현재의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가. 불평불만? 걱정? 또 걱정? 그렇게 걱정하면 자신이 원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그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우리는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인간은 누구나 언젠가 죽음에 이른다. 인체의 덩어리로 뭉쳐져 있던 의지들은 파편이 되어 태초의 상태로 흩어진다. 파편처럼 흩어진 의지들은 각자가 바라고 원하는 목적을 향해 또다시 나아간다. 

한 개인의 신체에 있던 의지들이 동시에 이동하는 것이 아니다. 나 한 사람의 의지만 보더라도 게으르고 싶은 의지, 활동적으로 움직이고 싶은 의지, 편안하고 싶은 의지, 관망하고 싶은 의지, 쾌락을 쫓고 싶은 의지, 해탈하고 싶은 의지 등 여러 형태의 의지들이 뭉쳐져 있다. 한 사람의 몸뚱이에서 여러 갈래의 의지들이 공존하고 있었다. 뱃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고 했던가? 내 몸 안에는 뱃사공이 정말 많이 살아가고 있다. 그렇게 내가 죽고 내 몸뚱이에 갇혀 있던 의지들은 태초의 상태로 돌아가 새롭게 자유를 얻는다. 또다시 동일한 목적을 원하는 의지들이 모여들어 또 다른 생을 얻게 될 때, 새롭게 태어나는 새 생명 안에 과거 다른 누군가의 생을 살았던 파편과 나의 파편들이 섞인다. 그렇게 또 다른 삶을 원하는 의지 덩어리들이 새로운 생명으로 잉태되는 것이다. 


우리는 태초에 존재하던 의지체로 시작해서 다시 태초에 존재했던 의지체로 되돌아간다. 인간이든 사물이든 그 무엇이든 쪼갤 수 있는 최소의 단위까지 쪼개면 인간의 신체를 이루고 있는 물질과 책상을 이루고 있는 물질은 동일하다고 한다. 그리고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단위를 ‘쿼크’라고 부른다고 한다. 우리 인간은 쿼크의 상태에서 존재했다가 인연에 의해 찰나의 순간 인간으로 머물다가 다시 쿼크 상태로 되돌아간다. 

과거가 곧 현재다. 오늘이 곧 미래다. 그러나 과거는 미래가 아니다. 과거와 미래 사이의 현재라는 변수가 존재한다. 현재가 미래를 든다. 과거는 지금, 이 순간 딱 여기까지만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내가 미래에 영향을 미치기를 허락하지 않으면 과거는 미래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 과거는 딱 지금 여기까지만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과거에게 내가 허락하면 과거는 미래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의지체들은 여전히 인간의 감각기관으로 인식 불가능하다. 우리 주변에 공기가 있지만 이 또한 인식하지 못하듯이 말이다. 그러니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느끼거나 알기를 바란다면 열린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있다’라고 믿고 바라봐야 그들을 느낄 수 있게 될 것이다. 의지체들을 느낄 수 있다면 자신이 이해한 대로 부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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