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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크릿 세이 Oct 21. 2023

왜 이 개고생을 하고 있을까?

달콤한 육체적 고통

7월 30일. 오후 2시.

산 입구에서 멈춰 섰다. 평지를 지나자 다음 관문은 오르막 산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눈앞에 떡하니 버티고 서있는 이 산은 넘어야 한다는 부담감에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배낭을 내려놓고 잠시 쉬기로 했다. 진한 초록색을 띠는 나무가 만들어 낸 진한 그림자의 서늘한 기운이 좋았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으니 어깨가 한결 가벼워졌다. 시원한 물을 한 모금 꿀꺽. 새콤달콤한 납작 복숭아를 한입 베어 물었다. 이 편안한 휴식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여기 머무르고 싶었다. 


‘여기에서 하룻밤 묵고 갈까?’ 잠깐 유혹을 느꼈지만 오늘 걸었던 15km 거리가 너무 짧았고, 지금 멈추기엔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부족하다. 그러나 이동해야 한다. 움직여야 한다. 그렇다고 흔쾌히 산 하나를 넘을 만큼 체력이 충분한 것도 아니라 이를 악 물고 결심해야 했다. 배낭을 둘러메고 내가 넘어야 할 산을 올려다봤다.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지만 어쩔 수 없다. 그래도 가야 한다. 여기서 멈출 수는 없지 않은가. 여기는 나의 목적지가 아니다. 그러니 서둘러 떠나야 한다.

오늘 여기서 멈추면, 내일 여기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오늘 저 산을 넘지 않으면, 내일 저 산을 넘어야 한다. 

오늘 넘지 않으면, 저 산은 내일 나의 장애물이 될 것이다. 


오르막길이라 산 입구에서부터 속도가 나지 않았다. 태양은 뜨겁고, 배낭은 무겁고, 발은 천근만근, 걷는 걸음에 속도가 붙지 않았다. 산을 오르다 멈춰 서서 앞으로 얼마나 더 가야 할지 알아보기 위해 고개를 들어 산을 올려다봤다. 얼마나 더 가야 가는지 끝을 가늠할 수 없었다. 산 정산은 보이지 않고 가파른 오르막길만 눈에 들어왔다. 한숨을 크게 쉬고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산을 오르다 멈춰 서기를 반복했다. 발걸음을 멈추고 서서 넘어야 할 산을 올려다보고 있자니 악에 받친 욕이 절로 흘러나왔다. 




“아악 젠장, 힘들어. 진짜 언제 도착하는 거냐고요. 진짜 힘들다고.” 힘들다는 말 밖에 달리할 말이 없다. 부글부글 끓는 화를 토해내고 나니 힘들고 지친 고개가 저절로 아래로 떨구어졌다. 아래로 떨궈진 시야에 발 등이 꽉 들어찼다. 오르막이 가팔라서 발 등이 코에 닿을 듯 가깝게 느껴졌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오른발과 왼발 엇갈림만이 인식되었다. 왔다 갔다 하는 오른발 왼발의 엇갈림을 보고 있으니 내가 걷는 이 길이 오르막인지 평지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신기한 감각이었다. 꼭 평평한 평지에서 발만 왔다 갔다 하는 감각이 신기하고 재밌기까지 했다. 분명 걷기에 힘든 오르막인데 평지 같다는 착각이 일어났다. 점점 실제 현실과 동떨어진 이질적 감각에 빠져들자 내 면 깊숙한 곳에서 메아리 같은 울림이 들려왔다. 


“힘들어? 무엇이 힘들어? 어떤 것이 힘들어?” 

당연히 힘들지. 나를 봐. 12kg 배당을 짊어지고 있잖아. 그리고 이 무거운 배낭을 메고 오르막길 산을 올라가고 있는데 어떻게 안 힘들 수가 있겠어. 

“그래, 그러니까 뭐가 힘들다는 거냐고. 배낭 무게가 힘들어?”

배낭 무게? 음… 생각해 보니 배낭 무게는 견딜 만해.

“그러면? 뭐가 힘들다는 말이야?”

음…. 발바닥? 아니지 발바닥은 괜찮은 것 같아. 잠깐만 기다려봐. 

그 순간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계속 나는 ‘힘들다. 힘들다’ 노래를 불렀는데 진짜로 나는 무엇을 힘들다고 하는 거지? 무엇이 힘들다는 것인지 나 자신조차 구분할 수 없었다. 뭔가 희한하고 독특하고 이상하고 찜찜하다. 나는 무엇을 힘들다고 말하는 것인지 분명히 밝히고 싶은 욕구가 일었다.


나도 밝혀내고 싶어. 내가 생각하기에 힘들다고 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상황인데, 너는 나에게 ‘무엇이 힘드냐’고 계속 물어보는구나. 사실 너의 그 질문이 살짝 당황스러워. 그런데 더 이상한 건 나도 그걸 찾고 싶어 졌다는 거야. 그러니 잠시만 기다려줘. 네가 납득할 만한 대답을 찾고 싶어. 그러니까 잠깐 기다려봐. 네가 찍소리 못하고 수긍할 수 있도록 나의 힘듦을 잘 설명할 수 있는 걸 찾고 싶어.


나는 내가 힘들다고 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내 신체를 찬찬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배낭의 무게도 견뎌낼 만하고, 발바닥에 잡힌 물집도 견딜 만했다. 한 걸음씩 오르막길을 오를 때 허벅지에 힘이 들어가는 순간 허벅지가 터질 것 같은 압박감이 감지되었다. 그래 바로 이것이 내가 힘들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알아차리자 곧이어 메아리가 다시 말을 걸어왔다.




“아아. 너는 허벅지가 터질 것 같은 압박감을 느낄 때 ‘힘들다’라는 말로 표현하는구나. 그래. 이제 네가 말하는 ‘힘들다’는 말의 의미를 잘 알겠어. 그런데 그게 그렇게 힘들어?” 

음… 생각해 보니 허벅지가 터질 것 같은 압박감이 그렇게 힘든 것 같지는 않아. 못 견디겠거나 죽을 만큼 힘들거나 하지는 않아. 솔직히 견딜 만해.

“그래. 좋아. 네가 앞으로 명심해야 할 것이 두 가지 있어. 하나는 ‘힘들다’라는 단어는 금지어로 정하자. 왜냐하면 ‘힘들다’라는 단어 속에는 이미 ‘힘들고 지치고 괴롭고 포기하고 싶은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내재되어 있거든. 그러니 너는 단 한마디 ‘힘들다’라고 내뱉는 것뿐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힘들다’라는 단어를 생각하거나 말로 내뱉는 순간 이미 너는 저렇게 많은 감정들을 끌어당기고 있는 거야. 어떻게 생각하니?”

알겠어. 그렇게 하도록 노력해 볼게.

“두 번째는 좀 전에 네가 시도했던 것을 계속해 봐. 이 길이 끝날 때까지.”

어? 좀 전에 내가 시도했던 것? 

“네가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신체의 변화를 관찰했던 것 말이야. 네 신체에 집중해서 너의 신체가 무슨 말을 하는지 귀 기울여 들어보라는 말이야. 좀 전에 너는 너의 신체가 하는 말을 들으려고 노력했고 또 신체가 하는 말을 듣는 데 성공했었지. 방금 그 감각을 절대 잊어버리지 마. 네가 너의 신체에 집중하고 관찰하려고 할 때 너는 들을 수 있을 거야. 


너의 신체가 하는 말은 너만 들을 수 있어.


그리고 너의 신체가 하는 말은 지금처럼 힘든 순간에 가장 잘 들을 수 있어. 왜냐하면 그 힘든 순간에 너의 신체도 발악을 하면서 너에게 말을 걸고 있는 거야. 평소에 네 몸이 편할 때는 신체가 조용하기도 하고 무슨 말을 하더라도 너무 작기 때문에 너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약해. 

그러니 지금처럼 너의 신체가 너에게 강하게 말을 거는 순간, 네가 조금만 노력을 들여도 아주 쉽게 신체가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어. 그러니 지금 네 신체의 감각이 가장 강하게 느껴지는 이 순간을 잘 활용해 봐.”


신제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내면 자아와 대화하는 동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산 정상에 올라와 있었다. 산 정상에 올라서서 생각했다. 이번에도 분명하게 선명하게 알아지는 깨달음이었다.




‘멀리 있는 목표만 바라본다면 괴로울 수 있겠구나. 아무리 노력해도 목표점은 너무 멀어서 현재의 노력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구나. 지금 산을 올라올 때처럼 목표점으로 향하는 방향은 놓치지 않되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해야만 고통스러운 순간을 헤쳐 나갈 수 있구나. 현재에 집중해야만 잡생각에서 휘둘리지 않을 수 있겠구나.’


또 과거의 어리석은 행동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회사를 다닐 때 평생 다람쥐 쳇바퀴처럼 반복적으로 회사를 다녀야 한다며 먼 미래만 보고 지겹고 무료함을 느꼈다. 현재에 하고 있는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하는 일이 잘 안 되는 것만 보고 힘들고 괴로워하며 발버둥 쳤었다. 어리석은 과거의 행동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고 난 후 다짐했다. 


‘현재에 집중하는 감각. 오늘의 이 배움을 절대 잊지 않겠다.’




8월 4일. 순례길을 걷기 시작하고 이주가 흘렀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처음이라.... 험난한 고생길이었다. 순례 중에 필요한 생필품을 담은 배당 12Kg 무게를 지탱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다. 걷는 걸음마다 등산화와 맞닿은 여린 살들이 쓸리고 쓸려 쓰라리게 자리 잡은 발바닥 물집이 고생스러움을 대신한다. 하루 8시간 걷는 것에 익숙하지 않아 부실하게 후들후들 떨리는 허벅지 근육,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떨리는 허벅지와 쓰라린 발바닥 물집을 보며 내 안의 투덜이가 말한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그만둬, 포기해’ 

‘편안한 집 놔두고 왜 사서 고생이야’ 

편안하고 아늑한 한국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포기하기에 너무도 합리적인 이유를 찾아 나를 타이르기도 하고, 겁을 주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하며, 어서 빨리 괴로움에서 벗어나라며 설득했다. 무언가 이루고야 말겠다는 강한 자신감과 결심이 초라 해지는 순간이었다.


반면 이성은 포기하기에 아까운 이유들을 찾아냈다. 13시간의 비행시간, 어렵게 퇴사까지 하며 얻어낸 한 달간의 여유, 순례길을 걷기 위해 투자한 시간과 비용, 한국을 떠나올 때 생각했던 굳은 결심. 여기서 멈추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린 것 같고, 이대로 계속 전진하기에는 확실한 무언가 없는 상태에서 이러지도 저리지도 못하고 마지못해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전진하며 하루 또 하루 순례길을 걷기 시작한 지 2주일쯤 지나자 어떤 생소한 감각을 느꼈다.


후들후들 떨리던 허벅지 근육이 단단한 스프링처럼 통통 튀듯 발걸음을 가볍게 했고, 쓰라리게 자리 잡은 발바닥의 물집은 단단하게 굳어서 더 이상 아픔을 느끼지 않았다. 단단하게 자리 잡은 허벅지 근육과 발바닥의 굳은살들이 나에게 속삭였다. ‘더 걸을 수 있다고, 걷고 싶다고 그만두지 않기를, 포기하지 않기를, 멈추지 않기를, 유혹에 빠지지 않기를 잘했다고 이것 보라고 할 수 있지 않느냐’고 말이다. 


‘아… 이것이 임계점을 넘기는 열쇠구나.’




또 분명하고 선명하게 알아지는 깨달음.

그때 뇌리를 스치는 깨달음은 이것이 진실이라고 말했다. 이것이 지금까지 내가 알지 못했던 진실이라고 말이다. 이제까지 실패와 힘듦과 어려움들이 함께했던 모든 과거는 모두 내가 못나서 바보라서 힘들었던 것이 아니라 처음은 원래 고생스러운 것이라고. 처음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어린아이가 걸음마를 넘어지면서 배우듯 처음 경험하는 모든 것은 익숙하지 않아서 치이고, 넘어지고, 다치기를 반복하는 하는 것이고, 그러면서 성장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전에는 이 단순한 사실을 바보처럼 알지 못했다. 과거의 어리석었던 행동들이 스쳐 지나갔다. ‘처음의 익숙하지 않음’을 인정하지 못했던 나는 상당히 많은 경험에서 실패와 마주했을 때 좌절하고, 힘들다며 포기하고, 어려움과 마주했을 때 괴로워했다. 나의 서툰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나 자신을 바보로 만들고, 자책하며 필요 없는 사람으로 만들면서 나의 존재를 스스로 짓밟았다. 타인의 서툰 모습을 볼 때도 마찬가지로 그들을 못난 사람으로 만들었고 비난했던 지난날의 부끄러운 모습이 떠올랐다.


이제는 나와 타인의 모든 ‘처음의 서툰 모습’을 인정하고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처음이라서 ‘어설픈 모습’이 ‘익숙한 모습’이 될 때까지 기다릴 수 있는 여유도 갖게 되었다. 이제는 초보일 때 실수할 수 있다는 초보의 특권을 받아들인다. 처음이라서 익숙하지 않고, 어설픈 나의 모습이 부끄럽고 쑥스럽지만 받아들인다. 처음이기 때문에 힘들고, 어렵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힘들고, 어렵다는 것이 멈춰야 한다거나 또는 포기해야 하는 핑계가 되지 않게 할 것이다. 이제 ‘힘들다’는 것은 ‘나의 한계를 뛰어넘고 있는 중이다’로 받아들인다. ‘어렵다’는 아직 내가 미숙하다는 것이고, 더 배울 것이 있다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처음이기 때문에 두려워서 쿵쾅대는 심장의 요동 소리는 처음이기 때문에 설레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처음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당연한 현상과 감정들이 더 이상 나의 앞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지 않게 할 것이다. 그리고 이제 당당하게 한발 나아간다. 언젠가 누군가는 나의 서툰 모습을 보고 지적하거나 비난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이제는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제가 처음이라 많이 어설퍼요. 괜찮으시면 좀 도와주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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