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인생은
한동안 잠을 잘 이루지 못하는 것 같아서 커피를 전보다 줄이게 되었다.
슬픈 일이었지만 나이가 드면 어쩔 수 없다고 넘겼기 때문에
보통의 아침은 남편의 커피를 한 모금 얻어 마신다거나 차로 대신하고
주말 아침만큼은 역시 커피지 하는 마음으로 한잔 마시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그러다가 문득 커피가 내리고 싶은 날이 생긴다.
온 집안에 커피 향이 퍼졌으면 하는 날 그건 날씨와는 별로 상관이 없다.
햇살이 거실 한가운데까지 길게 들어온 날이 되기도 하고
비가 올 것처럼 잔뜩 흐린 날이 되기도 한다. 내 마음이 그냥 설레는 것이다.
반가운 누구라도 만나는 기분으로 원두를 꺼내고 종이필터를 꺼내고 물을 끓인다.
오래도록 해온 일인데 오래 만나온 사람을 더는 못 만날 때처럼 그 순간이 새삼 소중해진다.
드립 커피는 커피를 줄이고 있는 나에게는 어쩐지 더 진할 것 같기도 하지만
다 마시지 않아도 좋지 않을까 원두를 갈고 내리고 향을 맡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우니까
일단 내리자는 생각이었는데 생각보다 맛있게 내려졌다.
애초에 한 모금만 마시겠다는 결심은 지켜지지 않는다.
그러다가 아 이 정도면 이걸로 먹고살아도 되지 않을까 헛된 꿈이 부푼다.
저 깊숙이 숨겨놓은 꿈이 생각난다.
오로지 드립으로 커피를 만들고 간단하지만 정갈한 샌드위치를 내는 작은 카페
언제라도 들르면 따뜻하고 맛있는 냄새가 나는 카페
카페를 하는 사람도 찾아오는 사람도 위안이 되는 카페를 해보는 것
가게는 작아도 정원이 있었으면 좋겠고 나는 정원 일에 능숙했으면 좋겠다.
톡 쏘는 세이지가 바람에 나불거리고 캄파눌라와 수레국화가 제철을 맞은
정원테이블에 앉아서 마시는 커피는 얼마나 맛이 좋을까.
그때는 더 나이가 들어 아예 커피를 마실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어쩐지 나무와 풀과 꽃이 있고 바람이 통하는 정원이 있다면 커피쯤이야 허브티로 대신해도 좋을 것이고
한밤중에 깨더라도 정원의 밤공기를 마시면서 얼마든지 마음을 달랠 수 있을 것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현실로 돌아오는 길을 잃지 않는다는 좋은 점도 있다.
그 꿈을 이루지 못해 조급해하거나 슬퍼하기보다는
지금 가지고 있는 것에 집중하는 능력이 놀라울 만큼 좋아진다.
그게 행복하게 사는 길임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하고 만다.
나이가 들었으니까 더 이상 도전을 말라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머지않아 가능한 일 그리고 너무 간절하지만 이번 생에는 어쩐지 어려울 것 같은-좋아하는 일과 그걸 잘해 낼 능력을 동시에 겸비하는 일은 드문 일이니까-일들을 계절 옷을 따로 보관하듯
착착 구분하는 것이 삶을 잘 흘러가게 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알아버린 것이다.
나이를 괜히 먹는 것이 아니라 이 얼마나 다행인지.
그렇지 않아도 몸 여기저기가 삐걱대는데 그런 것들을 부정하느라 괜한 에너지를 쓰고 싶지 않다.
좋은 것을 보고 감동하고 맛보는데 쓰고 싶다.
지금 당장 나에게 정원이라 불릴만한 공간은 없지만
대신 내 손에는 깊고 검은 잘 내려진 커피가 담긴 잔이 놓여 있고
아직은 잠을 조금 설치더라도 커피를 마실 수 있으니 감사하고 행복하다고 느낀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이렇게 작은 일에도 감사하면서
그동안 무심코 지나쳤던 수많은 감사의 순간을 만회해 가는 건지도 모르겠다.
오늘 맛있게 마신 커피는 잠과는 무관하길 바라며 홀짝 다 마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