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날도 있다

still fighting it

by 하이움

모두가 나가고 난 뒤

청소를 끝내고 환기를 마친 후

점심을 차립니다.

말끔해진 집을 둘러보면서

혼자 먹는 점심은

그건 그것대로 즐거울 때가 있습니다.

한여름 시원한 바람이 살랑이는

할머니집 평상 위 옥수수를 덮은 면포가 흩날리는 듯한

청량감 드는 기분 좋은 한낮


혼자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사람이 너무 많은 직장을 관두고

겨우 되찾은 조용한 점심시간이니까요

맛있는 음식을 좋은 사람이랑

나누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거지만

혼자 소박하게 즐기는 한낮의 밥도

꼭 내게는 필요한 시간이랍니다.

밝은 듯이 살아왔지만

속으로는 수줍음이 많고 낯을 가리는 게

부녀가 성격이 똑같다고 엄마가 늘 말씀하셨잖아요

밥 약속이 있어도 좋지만

취소가 되어도 좋은 이유겠지요.


결혼 전에는 혼자 살아보지 않아서 그런지

아무도 없는 집에서

밀린 드라마나

밀린 책을 읽으면서

난생처음으로 독립한 청춘처럼 설렐 때가 많았습니다.

혼자 있는 동안은

결혼생활이 아니라

자취생활 중이라는 공상에 빠져

집안을 종종 거리는 것이

일상을 즐기는 나만의 방법이랍니다.

오늘 점심은 어제 남은 카레

전날 남은 카레와 밥을 데워서 한 숟갈 입에 떠 넣는 순간

어찌 된 일인지

왈칵 눈물이 쏟아지네요

밥을 먹다 우는 장면은 막장드라마 아닌가요

드라마 답다고

너무 억지스럽다고 생각했는데

현실은 드라마고

드라마는 현실이었네요..


밥이 들어간다는 사실이

천연덕스럽게 카레를 먹고

청소를 하고

샤워를 하고

심지어 웃으면서 이야기도 하고

여행 사이트를 검색하고

무슨 일 있었냐는 듯 흘러가는

천연덕스러운 일상이

푸르기만 한 하늘이 견딜 수 없어

그런 거겠지요..

명랑한 척하시지만

아버지의 하루하루가 얼마나 고될지

더 이상 아침이 기쁨이 되지 못하는

아버지의 시간들이 얼마나 비통할는지

다 알지도 못하면서

무심한 딸

무심한 세상이

아버지를 외롭게 하는 것 같아서

눈물이 펑펑 났습니다..

시간이 가면 뭐든 무뎌지기 마련이고

그러니 살아지는 거긴 하겠지만

역시 인생은 만만한 것이 아니고

그저 맥없이 바라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서글펐습니다.

고스란히 남은 카레를 버리자니

그건 그것대로 마음이 편하지 않을 것 같아서

어쩔줄 모르는 마음으로

한손으로는숟가락을 입에 가져다 대고

다른 한손으로는

크리넥스 휴지를 뽑아댑니다.


얼른 먹어 치우려고 했으나

목구멍으로 잘 넘어가지지 않아서

잠시 몸을 움직여 밖으로 나가보기로 합니다.

화단에 심어 놓은 세이지가 씩씩하게

피어 있습니다. 기운 내라는 듯이

세이지의 꽃말이

건강, 활력이라는 거 아시나요?

별개 다 위안이 되는 요즘입니다.


바람이 끈적거리는 것이

성급한 여름이 오려나 봅니다.


다시 안으로 돌아와 남은 밥을 먹습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지금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기로 합니다.

슬픔이 일상이 되어서는 안 되므로...


아버지 그거 아세요?

카레는 전날 만들어 놓은 게 맛있다고들 해요

하지만 저는 갓 지은 밥이 그런 것처럼

카레도 금방 끓여낸 것이 취향이네요.


아버지

식사하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