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의무 사이
내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됐을 무렵, 엄마는 나를 품에 안고 무궁화호 열차에 몸을 실었다.
그때 모르는 아주머니 한 분이 엄마에게 다가와 말을 걸어왔다.
“아기가 엄마가 둘이네. 엄마가 둘이어야 살 팔자야. “
엄마는 황당했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린가 싶었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풍기는 기운이 어딘가 무당스러운 아주머니였다고 회상하곤 하신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 아주머니는 틀림없이 무당이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내가 6년째 외할머니의 병간호를 하고 있을 리가 없다.
내 곁에는 늘 할머니가 함께였다.
임신 중이던 엄마는 자궁이 약해 지속적인 하혈을 했고, 의사마저 아기를 포기하라고 말하던 그때 나를 살린 것도 할머니였다.
할머니의 살뜰한 보살핌 덕분에 엄마는 나를 지켜내기 위해 꼼짝없이 누워 요양생활을 할 수 있었다.
결국 나를 지켜낸 건 엄마의 몸이었지만, 엄마의 몸을 지켜준 것은 할머니였던 것이다.
내가 100일이 됐을 무렵, 할머니는 서울로 올라오셨고 나를 키우며 함께 살기 시작했다.
그래서 어릴 적 모든 기억에는 늘 할머니가 있다.
남들이 엄마가 해준 밥이 그립다고 할 때, 나는 할머니표 콩나물국이 그립다.
똑같이 끓이려고 해도 도무지 맛이 나지 않으니, 어렴풋한 기억을 더듬어 추억의 맛으로만 간직할 뿐이다.
사실 함께 살면서 싸우기도 참 많이 싸웠다.
“할머니가 뭘 알아!”부터 시작해서 온갖 성질을 부리곤 했다.
하지만 뒤돌아서면 미안한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와 괜히 쭈뼛거렸다.
할머니는 과거 출산 당시에 탈구된 고관절을 제때 치료받지 못하신 탓에 양쪽 다리 길이가 달랐다.
평생을 절뚝이며 걸으셨지만, 철없던 어린 나는 “할머니 펭귄 같다!”라는 망언을 내뱉기도 했다.
그때 할머니는 화를 내시기는커녕 “저게, 할머니를 놀려!”하며 호탕하게 웃어넘기셨다.
돌이켜보면, 그런 순간마저 웃어넘길 만큼 나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녀의 손녀 사랑이 얼마나 컸었는지, 새삼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그렇게 우리는 너무나 당연하게 함께 살았다.
함께 살아가는 일상이 너무 익숙하고 당연해서, 할머니의 건강마저도 영원할 거라 착각했던 것이 큰 오만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믿음은 참 어리석었다.
2020년 여름 즈음, 잠시 외출하고 있던 사이 엄마에게 전화가 미친 듯이 쏟아졌다.
평소와 다른 전화 패턴에 괜히 불안한 마음을 안고 전화를 받았을 때는 상상하지도 못한 내용이 귀에 꽂혔다.
“할머니가 쓰러졌어! 119 불렀으니까, 빨리 와!”
엄마의 목소리는 이미 잔뜩 흥분 상태였다.
당황하거나 놀라면 상황 판단을 빠르게 내리지 못하는 엄마의 성격상 굉장히 불안정한 심리 상태임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모든 걸 내팽개치고 택시를 잡아탔다. 집까지 달리는 동안 기사님께 빨리 가달라고 재촉했다.
집에 도착함과 동시에 119 구급 대원 분들이 도착했고, 나는 놀란 엄마를 대신해 구급차에 보호자 자격으로 탑승하게 됐다.
당시는 코로나 시기였기에, 병원 내부에는 보호자 한 명만 출입이 가능했다.
할머니의 병명은 뇌졸중, 흔히 말하는 중풍이었다.
정확히는 뇌혈관이 좁아져 막히면서 생기는 허혈성 뇌졸중이었다.
이로 인해 뇌세포는 정상적으로 산소와 혈액을 공급받지 못하게 되면서 손상된다.
한번 손상된 뇌세포는 다시 되살아나지 않는다.
작은 혈관 하나의 막힘이 우리 가족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쓰러지신 할머니는 병원에서 일주일간 입원 치료를 받으셨다.
나는 코로나 검사를 마친 뒤 보호자로 할머니 곁에서 머물렀다.
코로나 검사를 받은 보호자는 병원 밖 외출이 금지였기 때문에 일주일간 간이침대에서 쪽잠을 자야 했다. 보호자 식사도 따로 신청하지 않았던 터라, 병원 지하 편의점에서 삼각김밥과 라면으로 끼니를 때웠다.
그 시간을 통해 누군가의 ‘보호자’가 된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일주일의 입원을 마치고 퇴원하던 날, 할머니의 상태는 뇌졸중 발병 이전과 다름이 없어 보였다.
솔직히 나는 ‘이제 괜찮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었다.
그런데 다음날, 할머니의 말이 어눌해지고 편마비로 한쪽 몸이 늘어지는 걸 보는 순간, 그 기대는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담당의사는 으레 있는 일이라는 듯 담담하게 말했다.
“다시 입원하셔서 치료를 이어가시거나, 연세가 있으시니 약을 드시면서 진행을 늦출 수밖에 없습니다. “
완치라는 것은 이미 우리에게 허락되지 않는 단어였다.
뇌졸중은 생각보다 매우 흔한 질병이다. 특히 고령자일수록 뇌졸중 유병률은 급격히 높아진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 가족의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사실 친할머니도 뇌졸중을 앓다 돌아가셨다.
요양원에서 요양병원으로 옮겨 다니며 꽤 긴 시간을 투병하셨다.
그러나 나에게는 크게 와닿지 않았다. 친가 쪽과는 심리적 거리가 상당히 멀어, 정도 없고 유대감도 없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투병하시던 때도, 돌아가셨을 때도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외할머니는 나에게 제2의 엄마였다.
병원에서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의 대소변을 받아 낼 때도 더럽다는 생각보다 안쓰러움이 앞섰다.
할머니가 조심스레 내뱉은 “미안하다 “ 한마디에 가슴이 저려 울컥하기도 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 말은 시간이 지날수록 듣기 싫은 말이 되어 버렸다.
할머니를 간호하며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 가족은 삶이 피폐해져 갔다.
모두가 제대로 된 일상을 이어갈 수 없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내가 요가강사를 그만두고 엄마와 봉제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시간을 여유롭게 할애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옛말에 ‘긴 병에 효자 없다’라는 말이 결코 헛된 말이 아니었음을, 우리는 매일 실감하고 있었다.
처음의 안타깝던 마음이, 시간이 흐를수록 분노와 원망으로 바뀌어갔다.
어느 날, 한 껏 지친 엄마는 할머니에게 한탄하며 말했다.
“엄마! 우리 너무 힘들어. 요양병원 가자! “
그 한마디에 할머니는 눈시울을 붉히며, 엄마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오열하기 시작했다.
말이 어눌해 소통이 원활하지 않을 뿐, 정신은 또렷하셨기에 엄마의 말을 똑똑히 이해하신 모양이었다.
할머니는 잘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로 뭉개진 단어를 내뱉었지만, 우리는 똑똑히 들었다.
“손녀 다 키워 놓으니까, 필요 없어지니까 버리려는 거잖아.”
그 말에 숨이 턱 막혔다. 등 뒤가 괜히 서늘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우리는 황당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할머니는 정 많고 마음이 여린 분이셨지만, 때로는 이해하지 못할 행동과 말을 하시기도 했다.
특히 ‘자기중심적’ 사고는 평생을 함께 살며 우리와 마찰을 일으킨 주요 원인 중 하나였다.
1941년생인 할머니는 그 시절, 여자가 학교를 다녀서 뭐 하냐는 말을 들으며 글씨 하나 배우지 못하고 자라셨다. 그래서 그런 건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우리와는 조금 다르셨다. 좋게 말하면 순수하셨고, 나쁘게 말하면 세상물정을 모르는 분이셨다.
투병을 하는 와중에도, 고생하는 딸, 사위, 손녀보다 자신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는 할머니에게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만큼 우리 가족 모두가 지쳐있었다는 뜻이리라.
그러나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혀 요양병원에 모시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미 친할머니를 요양병원에 모셨던 경험이 있었고, 그때의 병원비를 떠올리면 눈앞이 아찔했다.
외삼촌들은 할머니의 요양비를 명목으로 매달 우리에게 소정의 돈을 보내주었다.
그 돈으로 기저귀, 패드 등 할머니에게 필요한 물품들을 구매했고, 경제 사정이 좋지 못했던 우리는 속된 말로 몸으로 때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매달 돈을 보내야 하는 삼촌들도 지치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그렇다. 긴 병에는 결국 효자도, 효녀도, 사위도, 손녀도 없었다.
처음의 효심 가득했던 마음도, 녹록지 않은 현실 속에서 결국 환자를 짐짝처럼 대하게 되고 말았다.
건강하다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신 분들을 우리는 흔히 ‘호상’이라고 부른다.
사랑하는 가족과의 준비되지 않은 이별은 큰 상처를 남기지만, 그리움과 슬픔, 연민을 함께 남긴다.
하지만 가족들이 오랜 병간호로 고생을 한 뒤 돌아가신다면, 우리는 자연스레 속으로 중얼거린다.
“이제는 편히 가세요.”
이 한마디에 가족의 사랑과 피로가 함께 묻어난다.
나는 그 사이 결혼을 했지만, 여전히 할머니의 병간호를 함께 하고 있다.
친정집과 신혼집이 같은 동네에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지치고, 원망스럽고, 동시에 안쓰럽다.
어쩌면 이것이 인간이기 때문에 자연스레 느끼는 희로애락의 일부가 아닐까?
어디선가, 사람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고 있는 것이라 했다.
잔인하게도 젊은 날은 짧고, 노인의 삶은 길기만 하다.
저출산, 고령화가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는 현대 사회에서, 이것은 비단 우리 가족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늙고, 병들고, 죽어간다.
삶이 무한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유한한 삶이라는 이유만으로도 흘러가는 시간이 야속하게 느껴진다.
“내가 제일 사랑하는 손녀.”
키운 정이 그렇게 무섭다고 했다.
친손주가 둘이나 있으면서, 본인 손으로 똥 기저귀 갈아내며 키운 외손녀를 제일 사랑한다던 할머니.
할머니는 내 기저귀를 거리낌 없이 갈아주셨지만, 나는 많은 인내가 필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 조차 사랑에서 비롯되었다고 감히 말하겠다.
그녀의 마지막이 언제가 될진 모르지만, 부디 손녀의 어리석었던 순간들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으셨으면 한다.
나 또한 언젠가 할머니를 떠나보낸 뒤, 필연적으로 후회를 안고 살아가게 될 것을 알고 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나는 여전히 긴 병 앞에서 관계의 민낯을 마주하고 있다. 하지만 그 민낯 속에서도 결국 사랑이 남는다는 것을, 부디 오래 기억하고 싶다.
할머니, 내 엄마.
다가올 삶의 마지막이 평온하시길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