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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옹알이 Sep 29. 2021

구멍에 대하여

그것에 처음 생긴 것은, 빛 정도는 돼야 겨우 지나갈 정도로 미천하고 작은 구멍이었다.

애초에 생긴 줄도 몰랐다.

위에서 붓는 것이 구멍으로 새어나가는 것보다 훨씬 컸으니까.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사진을 찍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고, 잠을 자고.

그것은 언제나 채워져 있을 줄 알았다.

그러다 구멍이 커진 것을 깨달았다.

붓는 건 똑같은데 새는 게 많아지니 티가 날 수 밖에.

기분 전환을 위해 쇼핑을 하고, 사람들과 만나서 웃고 떠들고, 어디론가 여행을 가고, 술을 마시며 더 많은 것을 부어넣었다.

큰 자극을 찾다보니 이전에 느꼈던 소소한 행복들에 무감각해져갔다.

하지만 비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무감각해져가는 스스로를 외면하고 계속 더 큰 자극을 찾았다.

이내 그것도 익숙해져버렸다.

쇼핑한 물건에 빠른 속도로 흥미를 잃었고, 사람을 만나도 계속 힘들다는 얘기만 했다. 술은 마실수록 남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구멍에 커진 것만 알았지 어떡할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구멍을 메우기보다 붓는걸 늘리는게 훨씬 쉬운 일이었으니까.

내 구멍은 조금씩 조금씩 커지고 있었다.

예전엔 늘 어느정도 차있어서 힘든 순간 모아놓은 행복을 조금씩 꺼내어 이겨냈는데 지금은 쌓인 게 하나도 없다.

이쯤되니 구멍을 메워야하나 고민했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 정도 구멍은 누구나 갖고 산다며 호들갑 떨지 말라고 했다.

또 다른 누군가는 내가 너보다 더 큰 구멍을 갖고 있으니 자기를 보며 위안 받으라 했다.

심지어 구멍을 세 개씩이나 가진 사람은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봐도 된다고 했다.

내가 사랑하는 가까운 사람들조차 나의 구멍이 어떤지 객관적인 대답을 해주지 못했다.

그러는 순간에도 구멍은 아주 조금씩 커지고 있었다.

어느 순간 붓는 족족 빠져나가는 수준으로 구멍이 커져버렸다.

그것은 더 이상 무언가를 채워놓는 기능을 잃어버린 채 껍데기만 남았다.

채워지지 않으니 충족할 수 없는 공허함만 남았다.

비어버린 것은 그 무엇도 막을 수 없었고 나는 아주 사소한 자극에도 아파 울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깨달았다.

내가 봐야했던 것은 구멍의 크기가 아니었다는 것을.

구멍이란 게 그렇다.

보이고 티가 나니까 신경이 쓰일 수 밖에 없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다들 구멍의 크기만 재고 있다.

니 구멍이 크네, 내 구멍이 크네.

내 구멍이 더 크니까 너는 덜 힘든거네.

나는 너보다 더 큰 구멍이 있는데도 잘 살고 있네.

난 구멍이 세 개나 있어도 잘 사는데 넌 고작 하나 가지고 엄살이네.

사실은 어디에 구멍이 났는지를 봐야하는데 다들 보이는 구멍에만 집중한다.

슬프게도.





그것은 사람마다 다른 크기를 가지고 있다.

어떤 사람은 양말 크기이고 또 어떤 사람은 책가방 크기일 수 있다.

새끼 손톱만한 구멍이 생겼다고 치자.

양말과 책가방 크기의 그것을 놓고 비교했을 때 어느 것이 더 빨리 비워질까.

만약 내가 가진 것이 양말 크기라면 나는 아주 작은 구멍에도 예민하게 신경써야 한다.

구멍은 메워야하는 때가 있기 때문이다.

비록 크기는 양말이 작더라도 내가 거기에 행복을 채워놓고 만족한다면 충분할 수도 있다.

작게나마 기능을 하는 것과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은 엄연히 다르다.

그래서 구멍은 메워야하는 때가 있다.







사람들이 자기가 가진 것에 크기를 먼저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남의 구멍에 대해 함부로 왈가왈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누군가에게는 그 구멍이 아주 치명적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다들 각자가 가진 구멍을 제때 메워가며 그것이 비지 않도록 잘 돌보며 살았으면 좋겠다.

구멍이라는게 그렇다.

보이고 티가 나니까 신경이 쓰일 수 밖에 없지만 아주 찰나에 감당하지 못할 만큼 커져버리기도 한다.

모르겠다.

구멍을 어떻게 메워야하는지 가늠할 힘조차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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