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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청안 에세이작가 May 04. 2020

한 번에 한 걸음씩밖에 걸을 수 없다

다리 길이가, 서 있는 위치와 높이가 달라도, 누구나 한 번에 한 걸음씩

2월 20일경이었다.  나는 일신상의 이유로 일주일간 입원하게 되었다. 그런데 내게 늘 감동만 주는 우리 팀장님이 이런 말로 또 한 번의 감동을 준다. "이대리(나) 내일부터 입원인데 밥이라도 한 끼 좀 든든하게 먹여서 들여보내야 되지 않아요?"하고 부장님(부서장)께 의견을 전하는 말. 그리하여 부서 전체가 다 같이 점심식사를 하게 되었다. 업무영역이 다양하고 하는 일은 많고, 인원은 비교적 적은 우리 부서. 내가 없는 일주일(그나마 나 없어도 그럭저럭 괜찮을 시기로 입원 일정을 정했지만) 어찌 보낼지 참으로 걱정되기만 했는데, 다들 내 걱정을 얼마나 해주었는지, 너무도 고마웠다. 그리고 나는 새삼 또 느꼈다. 내 곁에는 늘 좋은 사람이 있음을. 감사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끔 팀장님은 너무도 '호인'이고 부장님은 무척이나 '선비'라서 "아, 나라도 악역을 해야겠다!"싶을 때가 있다. 부서 간 이해관계가 얽힌다거나, 나라도 좀 드센 척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상황에 놓일 때 말이다. 아마도 부장님 팀장님을 비롯한 부서원 모두가 다들 좋은 사람이라 이런 생각을 하게 되나 보다.




각설하고, 그 날 다 같이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돌아오는데 이제 막 횡단보도의 신호가 빨간불에서 파란불로 바뀌었다. 아마도 그때 그 질문을 던진 건 팀장님이었을 것이다. "다들 건널 수 있어요?"하고. 그러자 제일 다리가 긴 한대리가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네"하고 대답했다. 아마도 한대리는 내가 부서원 중 유일한 여자이기도 하고 힐을 신고 있었으므로 무의식 중에 쳐다본 것이겠지. 그렇게 다 함께 길을 건너다보니, 어느새 파란불이 깜박깜박거리며 곧 위험한 빨간불로 바뀔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나는 짧은 다리로 전력질주를 했다. 그리고 횡단보도가 끝나는 그 지점에 한대리의 얼굴을 바라보게 되었다. '학 다리'를 가진 그는 횡단보도를 성큼성큼 몇 발짝 내디뎠을 것이고 추측컨대 제시간에 맞춰 길을 건너기가 그리 힘들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헥헥거리다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대리님은 다리가 길어서 좋겠어요." 그는 흠칫 여유 있게 웃다가 대수롭지 않게 "에이 비슷해요."라고 했다. 나는 속으로, '짧은 다리로 종종거려야만 하는 나보다는 늘 여유가 있을 수밖에 없지' 하고 생각했다. 그가 매우 부럽진 않았으나 타고난 보폭으로 앞서 나갈 수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유리한 고지'이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해보면, 사람은 누구나 한 번에 한 걸음씩밖에 걸을 수 없다. "나는 한 번에 두 걸음 열 걸음을 걸어." 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와보라고 해. 인생이라는 길에는 분명 반칙과 권모술수와 변수가 난무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나를 속여서는 안 된다. 속이지 않고 한 번에 한 걸음씩. 내가 소화할 수 있는 보폭을 속이지 말고, 한 걸음씩 차분하게 나아간다면 언젠가 열 걸음을 먼저 걷고 자만심으로 멈춰 선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때 다시 자만하지 말고 포용하고 같이 걸어야지. 정직하게 한 걸음씩. 지구는 둥그니까. 앞으로 나아가면 모두 다 만나겠지. 빨리 걷는 것보다 조바심 내지 않는 것, 올바르게 걷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스텝이 꼬이면 넘어지게 된다.



*** 이 글은 에세이 베스트셀러 ‘너의 사회생활이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어’ 에 수록된 초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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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빛나는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라는 제목의 책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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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면증 오디오클립 '책 읽다가 스르륵'을 연재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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