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들을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유
1991년 봄, 국가의 불의에 저항하던 11명의 청춘들. 6월 항쟁 이후 독재 정권이 끝나고 봄이 올것이라는 모두의 기대와 달리 노태우 정권은 그 이전 정권과 크게 다르지 않은 강압적인 독재 정권이었다. 이런 현실에 분노, 절망 한 청춘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기 시작한다. 그해 5월에만 9명이 분신 자살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그 1991년 봄, 강기훈씨가 유서대필 조작사건에 휘말린다.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씨가 투신을 하게 되는데 김기 설 씨의 유서를 강기훈씨가 대신 썼으며 김기설의 자살을 방조했다는 혐의이었다. 검찰은 이로 인해 강기훈씨를 구속한다. 강기훈 씨는 억울함을 호소했으나 결국 징역 3년의 선고를 받고 3년이 지나서야 출소한다. 수십년이 흐 르고 2015년이 되어서야 재심을 통해서 무죄 선고를 받게 된다.
이 영화는 분명 강기훈씨가 휘말린 유서대필 조작사건을 중점으로 아픈 역사를 조명하고 있다. 일반적인 다큐멘터 리라면 강기훈 씨가 중심이 되어서 이야기가 전개 되어야 하지만 영화에서 강기훈 씨가 과거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거나 말을 많이 하는 모습을 볼 수 없다. 말보다는 기타 연주를 하는 모습을 주로 볼 수 있다. 이 영화에서 유일 하게 볼 수 있는 강기훈 씨의 말하는 모습이라고는 진실의 힘 단체에서 담당자와 시덥지 않은 농담을 하며 투닥 거 리는 모습이거나 시시하게 살았던 이야기, 기타 발표회에서 연주 전 잠깐 애기하는 모습 등이 전부이다. 권경원 감 독은 피해자가 트라우마적 상황을 반복 설명해야 하는 문제에 대해 피해자 대신 그 주변인들이 이야기를 하게 하 는 방식을 택한다. 피해자가 직접 트라우마적 과거 상황을 설명하게 하는 것이 기자의 태도 로서는 옳을지는 모르 나, 사건을 대하는 태도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피해상황을 되새김질 하는 것만으로도 고통스 러운 피해자에 대한 연출자로서의 배려가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또한 강기훈씨가 국가적 폭력의 피해자일뿐만 아 니라 한 사람일 뿐이라는 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조명하고 있다. 국가 폭력의 피해자. 말기 암환자. 딸의 아버지. 강기타. 강기훈. 강기훈 씨를 설명할 수 있는 수식어는 많지만 이 영화는 강기훈 씨를 국가 폭력의 피해자로만 보 고 있지는 않다. 이는 강기훈 씨의 기타 연주에 대한 애정, 강기훈 씨가 직접 찍은 사진등으로 드러나고 있다. 만약 강기훈 씨의 피해자로서의 인터뷰만이 영화에 보여 졌다면 이러한 인간적 면모는 보지 못했을것이다.
강기훈 말고 강기타
8막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영화를 이끌어나가는 주 모티프는 기타 연주이다. 강기훈 씨가 연주회에서 연주한 8곡 이 영화에 사용 되고 있고 권경원 감독은 이 영화를 강기훈 씨를 위해 앨범을 내주는 느낌으로 만들고 싶었다고 말 하며 이 영화가 음악 다큐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기타를 연주하는 강기훈씨의 손, 그 장면에 대한 확신이 영화를 계속하게 만든 원동력이었던 것 이다. 영화에 사용된 강기훈 씨가 연주하는 기타 연주 곡들은 유명할 뿐만 아니라 영화음악으로도 많이 쓰이는 곡 들이다. 사라방드, 카바티나, 아멜리아 공주의 유서 등 미묘한 선곡들이 영화의 맥락과 맞아떨어지는 부분을 볼 수 있으며 강기훈 씨의 심정을 표현해주는 역할을 한다. 또한 음악은 인간 강기훈에게 일종의 삶을 확인하는 매개체 가 되며 앞서 언급했던 인간 강기훈의 면모를 볼 수 있다. 기타 연주회 자리에서의 강기훈 씨의 짧은 코멘트와 그 연주는 백마디 말보다 그의 심정을 더 잘 대변해주고 있다.
과거를 다루는 방식
과거사 다큐멘터리이기에 이 영화가 과거를 어떻게 다루는 방식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권경원 감독은 사실 에 대한 재연도 누군가에 의해 해석된 것이라 말한다. 해석된 사실이 진실로 왜곡될 수 있고 이를 경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감독은 과거를 재연하는 방식으로 재연배우의 재연이나 방송자료 대신 인형극, 미니어쳐를 사용한 방식을 선택한다. 사건과 거리를 둠으로서 감정적 과잉을 벗어나고자 한 의도로 선택한 방법인 것이다. 이런 맥락과 비슷하게 <1991년, 봄>은 슬프고 충격적인 과거사를 다루고 있으나 신파적인 장면이나 눈물을 유발 하는 장면은 잘 볼 수가 없었다. 강기훈씨를 대변하는 1991년 봄의 기억을 안고 살아가는 다른 인물들이 자주 등 장해 이야기를 하지만 그들은 과거를 회상할때 충격적인 내용에 비해 꽤 담담한 태도로 사건을 서술한다. 피해자 의 상황에 감정적으로 공감시키는 형식의 연출이 영화 전체적인 신뢰도를 떨어트릴 수 있다는 생각을 한 것. 오히 려 이러한 담담한 연출이 주는 울림이 주는 힘이 있었던 것 같다.
1991년 봄은 지나고, 그 봄을 기억하는 사람들 보다 잊은 사람이 더 많은 현실이지만 그 봄의 상처를 죽을 때 까 지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지만 역사는 한 번도 멈추지 않고 계속 흐르고 있다. 유 서대필 사건은 대부분의 이들에게는 관심 밖의 사건 과거의 일에 불구하지만 어떤 이에게는 종결되지 않은 사건이 다. 1991년 봄을 지나 최근의 4.16 세월호. 국가 폭력의 피해자는 있지만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현실이 진정한 의 미로 1991년 봄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도 기억하고자 하지 않는 현실을 기억하고 잊지 않 으려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강기훈 씨를 포함한 제 2의 강기훈들에게 봄이 오길 소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