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신 햇살에
잠이 깨기 시작했다
눈을 뜨고
얼른 세수하기 시작했다
옷 입기를 시작하고
출근하기 시작했다
버스가 오기 시작했다
직장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배가 고프기 시작했다
점심을 먹고 오후를 시작했다
퇴근 시간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퇴근 후
옛 친구와의 만남으로 들뜨기 시작했다
오랜 이야기와 수다를 시작했다
끝낼 생각을 하니 서운하기 시작했다
다음 약속이 기다려지기 시작했다
시작만 했던 하루
또
내일의 시작을 위해 잠들기 시작했다
시작이라는 단어를 이리 많이 쓰는지도 몰랐다. 실로 우리는 끝이라는 단어를 일과 공부를 할 때 그리고 빨래할 때를 제외하고는 쓰기를 두려워하는지도 모른다.
연말이 되어 시상식을 볼 때라야 한 해가 끝을 달린다는 걸 깨닫는다. TV의 여기저기에서 어서 한 해를 마무리하라고 종용한다. 또다시 끝이다. 끝을 위한 향연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기억도 잘 나지 않는 한 해. 기억에 남을 정도로 열정적으로 살았던가? 생각이란 건 하지 않고 몸의 본능만으로 살아온 것은 아닌지 자책해 본다. 예전에는 그래도 한 해 동안 무얼 했나 자신을 탓해도 보고 다른 계획을 세워도 보았는데 이제는 그저 다른 이의 이야기인 듯, 아무런 감흥 없이 이불을 끌어당겨 몸을 데우는 데 여념이 없다. 그저 프라이드치킨이나 한 마리 시작하고 싶을 뿐이다.
누구나 완벽하게까지는 아니더라도 마무리는 잘하고 싶다. 그러나 욕심은 시작만 있고 끝이 없다. 결국 일에 대한 마무리도, 욕심에 대한 마무리도 끝을 보지 못하고 새 해 시작에 묻어가고 만다. 완벽한 끝이란 결코 없음에도 완벽한 시작에 대응하는 끝을 보려고 자꾸만 자신을 부채질한다. 왜 그런 걸까? 항상 시작은 가볍고 부담 없이 시작할 수 있었는데 끝은 그 말도 무거워 중저음의 망치질 소리처럼 무겁게 울린다. 시작만큼 끝도 가벼울 수만 있다면야 누구든 새로 시작하겠지만 실패에 대한 두려움, 완벽하고 멋진 마무리의 ‘끝’에 대한 부담이 시작마저 주저하게 만든다. 시험 전에 찝찝하게 끝냈던 공부, 썩 좋지 않게 끝이 났던 첫 연애, 사직서를 내고 회사를 나올 때의 허탈감. 그 씁쓸함이 ‘끝’이라는 이름의 명성에 자꾸만 얼룩을 남긴다. 심지어 외국어, 운동 등과 같은 취미는 시작할 용기마저도 내어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시작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앞서 본 것처럼 하루에도 수십 번씩 하는 시작이기에 실패했던 모든 끝을 다시금 시작해 본다. 설사 시작에 대응하는 멋진 마무리는 그저 이상향이라 할지라도 누구에게나 돌아오는 한 해의 마지막을 마무리하며 만족스러운 끝을 연습해 본다. 그래. 한 해의 시작과 끝은 삶의 시작과 끝을 위한 연습인 것이다.
나름의 방법으로 시작하는 법도, 또 마무리하는 법도 계속해서 연습해 나가는 것이다.
처음의 시작처럼 '설레고 겸손한 마음'이 끝을 향해 가는 동안 계속된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건 그저 욕심일 따름이고, '변함없이 처음처럼' 또한 불가능하니 계속해서 또다시 시작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저 다시 처음이고자 하는 마음만은 변함이 없도록 또다시 리셋(RESET). 시작본능(本能)을 발동한다. 서툰 사랑과 같은 마음의 상처는 오히려 훈장이니, 완벽한 끝보다는 현명한 끝을 위한 마음의 여유를 가져본다.
일전에 TV 연말 시상식에서 보았던 배우 ‘장미희의 감동에 찬 목소리 "아름다운 밤이에요"는 인기리에 유행어처럼 번지면서 밤의 마무리나 한 해의 마무리 자리에서 마법의 지팡이처럼 휘둘러 쓰이곤 했었다. 그토록 빛나고 영광적인 마무리를 모두가 흉내 내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설사 그토록 눈부시게 아름다운 마침표는 아닐지라도 아름다운 한 해의 마무리를 위해 다시금 시작은 해 보는 거다. 끝을 위한 시작을 말이다. 새로 산 가죽 구두가 편안하다고 느낄 즈음이면 이미 많이 닳아있다. 또 새로 사야 할지도 모를 형편이다. 그만큼 벌써 끝과 가까워져 있다는 뜻이다. 어쩌면 끝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영원히 또 다른 시작을 위해서만 존재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모두 어깨를 활짝 펴고 시작본능을 발동해 보자. 언제든 본능의 힘을 받아 그 끝마저 아름답게 발현될 날이 틀림없이 올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