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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isha Mar 02. 2023

슬픔 백신


 TV를 자주 보는 편은 아니다. 가끔 밤늦게 홀로 영화를 아주 집중해서 보곤 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꼭 보아야 했다. 자매들끼리의 보다 유연한 대화를 위해서  반 강제의 권유가 있었다. 솔직히 보고 싶은 마음은 컸지만, 내 안의 안타깝고 슬픈 감정들을 끄집어낼 게 당연하기에 이토록 미루고 미루었었다. 판도라의 상자처럼 마지막에는 희망이 존재할 것 또한 예상하지만, 그 희망을 찾기까지의 과정이 힘들 거라는 것도 예상되기 때문이었다.


더 이상 미룰 수 없어, 자그마치 한 편당 1,500원에 시즌1을 연속으로 시청하기로 마음먹고 리모컨을 눌렀다. 슬픈 예감은 언제나 적중한다고 했던가. 1화부터 입술을 꼭 깨물고 눈물을 주룩주룩 쏟아내며 휴지로 여러 번 얼굴을 짓이겨 닦았다. 아빠의, 언니의, 또 조카의 보호자로서 병원에서 보냈던 지난 시간이 절대 짧지만은 않았던 터라, 이 현실적이고도 가슴을 쥐어짜는 이야기에 완벽하게 동화되었다. 가슴이 저릿해 가슴께를 툭툭 쳤다. 슬픈 장면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한바탕 눈물을 흘리다가도 희망적인 소식에 함께 기뻐하고 또, 구석구석 재미있는 포인트에서는 웃음이 터져 박장대소하며 손뼉을 쳤다. 누군가 지켜보는 이가 있었더라면 심각하게 내가 괜찮으냐고 물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내 마음을 들었다 놓았다 하는 이야기에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며 나도 모르게 저절로 길고 긴 골수팬 대열에 줄을 섰다.


제5화를 보고 있을 때쯤, 문득 스쳐 가는 생각은 ‘아, 다행이다’라는 위안이었다. 과거야 어쨌든 지금은 우리 가족 모두가 아주 큰 아픔 없이 적당히 건강하다는 사실이, 또 혹여나 누군가가 크게 아프게 되더라도 이전처럼 같이 버티고 이겨내 줄 사랑하는 가족들과 친구들이 있다는 사실에 가슴을 쓰다듬었다. 이야기 속의 슬픔이 커지면 커질수록 안도감 또한 컸다. 아하! 이래서 돈을 주고 슬픔을 맛보는 걸까? 그다음에 올 안도와 희망을 맛보기 위해서?


 얼마 전 읽은 김초엽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라는 책 안의 짧은 소설「감정의 물성」이 생각났다. 굳이 슬픔과 분노에 대해 대가를 치르고 사들인다는 생각 해본 적이 없었다. 어느 누가 슬프고 우울한 감정들을 돈으로 사겠는가? 하지만  김초엽의 글에서는 사람의 감정을 사물에 주입하여 직접적으로 느낄 수도, 만질 수도 있도록 이야기가 구성되어 있다. 그저 물건 안에 사람들의 감정을 자극하는 화학적인 성분을 주입함으로써 바로바로 그 감정을 느낄 수 있다. 무턱대고 구매하는 바람에 감정의 혼돈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매너리즘에 빠지기도 했다. 비록 짧은 소설이었지만 글 속의 말처럼 우리에게는 기쁨의 감정만 있을 수 없으며 그 반대의 감정 또한 당연한 듯이 자연스레 대가를 지불하고 사들이고 있었다. 아프지만 추억이 깃든 감정, 도움은 되지만 좌절이 스며든 감정들조차도.


소비가 항상 기쁨에 대한 가치를 지불하는 행위라는 생각은 이상합니다. 어떤 경우에 우리는 감정을 향유하는 가치를 지불하기도 하기 도 해요. 이를테면, 한 편의 영화가 당신에게 늘 즐거움만을 주던가요? 공포, 외로움, 슬픔, 고독, 괴로움… 그런 것들을 위해서도 우리는 기꺼이 대가를 지불하죠. 그러니까 이건 어차피 우리가 늘 일상적으로 하는 일이 아닙니까? - 김초엽, 「감정의 물성」 중에서


 돈을 주고 산 슬픔은 백신처럼 눈과 귀를 통해 내 마음에 들어와 슬픔에 대항하는 면역력을 조금씩 키워낸다. 한방의 따끔한 슬픔으로 길게 행복할 건강한 정신을 깨우치고 지속하게 하는 것이다. 기-승-전-행복. 살아가면서 우리가 하는 모든 이야기와 대화는 행복을 찾기 위해서 펼쳐진다. 결국은 우리 자신의 행복한 미래를 위해 돈을 지불해서라도 영화나 드라마 같은 이야기나 그러한 감정들을 머금은 물건을 통해 슬픔과 좌절 등을 미리 맛보는 것이다. ‘슬기로운 의사생활’과 김초엽의「감정의 물성」이라는 글을 통해서 슬픔이라는 백신을 맞고 절박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희망을 잃지 않도록, 앞으로의 슬픔에 맞설 수 있는 용기를 키워내 본다. 오히려 즐겁기만 한 드라마나 영화보다도 더 절실하게 슬픔에 대한 면역력을 끌어내어 줄 최상의 백신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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