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몰토크가 어려운 사람

by 아기돼지

나는 마음 맞는 상대와 나누는 대화를 무척 사랑하지만 스몰토크에는 약하다. 아니 약하다고 할 수 있나,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상대와 분위기에 맞게 다양한 소재를 소환하여 이야기를 이끌어 나갈 수 있다. 그러나 좋아하지 않는다. 날씨가 어쩌고 오늘의 빅뉴스가 어쩌고저쩌고 하... 그런 대화에 관심이 1도 없다. 어쩌자고 이런 성격을 타고 났을까, 싶지만 겨우겨우 갈고 닦은 사회성 덕에 “저 사람 좀 이상한데?” 소리는 안 듣고 산다. 물론 내가 안 듣는다는 것이지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어디선가 누군가는 그렇게 말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한때 나는 들어오는 소개팅의 열에 아홉은 다 쳐내고도 도무지 거절할 수 없는 소개팅이 잡히면 그게 누구든 나가기 직전까지도 가기 싫어 끙끙 앓았다. 재벌 2세가 나와도 그랬다. 물론 재벌 2세, 구경도 해 본 적 없지만요. 그러다 막상 나가서는 화사하게 웃고 떠들며 이야기를 했다. 내가 사실 내향형의 사람이라고 말하면 상대는 웃었다. 그렇게 집에 와서는 간신히 신발만 벗고선 방바닥에 드러누웠다. 제가 왜 결혼 못했는지 아시겠죠.


직장에서도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으면 나는 가던 길도 돌아간다. 미용실에서 미용사가 말을 걸면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열띠게 호응하지만 마음속으로는 한숨을 푹푹 쉰다. Jolla 피곤하네, 하면서.


이런 나지만 어느덧 사회생활 16년차다. 지금 내가 다니는 직장에는 커피머신이 아래층에 딱 한 대 있다. 커피를 뽑아 가기 위해 동료들은 대부분 8:30~9:00 사이에 각자의 텀블러를 들고 모인다. 자연스레 서넛씩 모여 간단한 커피챗이 형성된다. 나는 텀블러를 들고 아무도 없는 9:40에 내려간다. 혼자 조용히 내려가 커피머신 앞에서 커피만 뽑아 들고 다람쥐 같이 날쌔게 내 자리로 복귀한다. 왕따는 아니니 걱정은 말아주세요.


그러나 인간은 모순덩어리다. 참새처럼 짹짹거리며 만나기만 하면 스몰토크로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만드는 사람을 나는 (피곤해 하면서도) 고마워한다. 세상에 나 같은 인간만 있다면 정말이지 살 맛 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집단에서 내가 한 발 물러나 관망만 해도 되는 속 편한 상황이 만들어지는 건 발 빠르게 대화의 물꼬를 터 사람들의 얼굴에 미소를 띠우는 빛나는 존재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리터럴리 빛이 나는 존재들이다.


Y는 나보다 세 살 많은 직장 동료다. 그녀는 내가 커피를 9:40에 내리러 가게 만든 제1공헌자인데, 남들 다 내려가는 시간에 커피를 내리러 갔다가 그녀에게 꼼짝없이 잡혀 몇 번이나 스몰토크의 깊고 넓은 늪으로 빠진 이후에 나는 9:40 커피 추출 타임을 고수하게 되었다. 이후 Y는 오며가며 나를 볼 때마다 왜 요즘 아침에 보이지 않느냐며, 내일은 꼭 내려오라고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도 말한다. 엘리베이터는 떠나도 그녀의 목소리는 공기 중을 떠돈다.


그녀는 아침 커피타임으로도 모자라 오후에도 종종 나를 찾아온다. 그녀와 나는 업무적으로 겹치거나 공유할 작업이 있는 사이가 아니다. 그럼에도 무턱대고 찾아와 내 옆자리에 앉기에 처음에는 무슨 큰 일이 난 줄 알았다. 알고 보니 그저 k-직장인으로서의 푸념, 열 살 난 아들을 둔 엄마로서의 어려움, 각종 할인 정보와 쿠폰 다운로드 방법까지 그야말로 주제를 넘나드는 ‘수다’의 장을 펼치고자 산 넘고 물 건너 내 자리까지 찾아온 것이다.


그녀 덕에 나는 직장에서 벌어지는 흥미로운 오프더레코드를 몇 개 주워듣게 되었다. 올 여름 내내 잘 신고 다닌 샌들도 그녀가 어디 쇼핑몰에서 할인을 엄청 때린다며 지금 당장 사야한다고 알려주어 산 것이다. 그 뿐인가. 그녀는 직장 밖에서 편하게 맥주를 마시자며 끝내 나를 본인의 집으로 초대하여 파도 파도 마르지 않는 생생정보통급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그리하여 종국에는 이 글을 촉발시켰다.


물론 나는 그녀 덕에 직장이 조금 더 즐거워졌다. 나를 ‘동료1’로 대하는 사람도 편하지만, 내 이름 석자로 대하는 사람은 소중하다. 그래도 커피는 여전히 9:40에 내리러 간다. 하나 더,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내리기 전 그녀의 차가 들어오면 나는 차 안에서 그녀가 건물 안으로 사라질 때까지 기다린다. 어쩔 수 없다. 나도 살아야지.


나도 그녀가 좋다. 다만 우리는 서로를 좋아하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그녀의 앞날에 행운과 건강이 가득하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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