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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전에 시 한 편 쓰고 싶다-나태주


시인과 독자의 벽


바쁜 육아로 글쓰기를 못하는 날들이 길어지자, 마음속 자아의 집은 주저앉기 시작했다. 

와르르 무너지면 어쩌나... 지금까지 하나하나 쌓아 올렸던 노력이 물거품이 되면 어쩌나 노심초사하였다. 그러다 안 되겠다 싶었고, 짧게라도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둘째를 재우고, 놀고, 먹이는 동안 한 손으로 핸드폰으로 끄적대며 시의 형식을 빌려 짧은 글을 적어 나가게 되었다. 

짧게라도 내 식대로 시라 생각하며 하나하나 적으며 울분을 토해내자 마음의 허리케인은 잦아들기 시작했다. 

요 한 달은 시라고 말하기도 뭣한 멘땅에 헤딩 식의 내 마음대로의 시를  적어 나갔다.

그러다, 진짜  시가 궁금해졌다.


시라는 건 어떤 거지? 


진짜 시를 알고 싶고 써보고 싶었다.

인터넷을 검색하며 여러 시들을 접하기 시작했다. 시들은 너무 난해했고, 대체 무얼 의미하는 건지 알 수 없는 시어들이 나를 우롱했다. 

읽으면 기분이 좋아져야 하는데, 읽을수록 스트레스가 되어갔다. 


시가 좀 쉬우면 안 되는 건가? 


시작법 책을 읽으면 나아질까 싶어 여러 권 빌려보았다.


왜 그리 전문용어가 많고, 어려운 단어는 즐비하며, 한자는 쉼 없이 나오는 걸까.

대학교 때 읽었던 전공 참고 서적처럼 두껍기만 했다.


왜 이렇게 어려워....


관심을 가지고 시에 대해 더 알고 싶은 마음이 금세 시들해지려 할 때 이 책을 읽게 되었다.

그러던 중 나태주 시인의 책에 나온 문구들이 내 마음을 두드렸다.






- 정말로 오늘날 우리 시인들의 시가 그런 소임을 맡았으면 좋겠어요. 삶에 지친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 기쁨을 주고, 사랑하는 마음을 회복해주고, 드디어 행복감에 이르게 하는 역할을 해줬으면 좋겠어요. 시골 시인이며 작은 시인이며 늙은 시인이지만, 내가 쓰는 시 한 편에 정말로 그런 반창고가 들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봅니다.



-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시는 어떤가요? 과연 생명을 생명답게 가꾸게 하고 돕는 그런 시인가요? 한 번쯤 시인들은 자기가 쓰는 시에 대해서 반성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말이나 기교만 더부룩이 살아있고 마음을 담지 않은 시, 시는 없고 시인만 덩그렇게 두드러진 시. 그런 시들을 써놓고 시인들은 시치미를 뚝 떼고 있는 겁니다.

흔히 시인들은 시의 시대가 끝났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정작 독자들은 시가 필요하다고 말하면서 읽을 만한 시가 없다며 애달파합니다. 거기에 시인과 독자의 높은 벽이 있는 겁니다. 그 벽을 허물어야 합니다. 그것이 시인과 독자가 사는 길이고 시가 사는 길이며, 생명을 생명답게 만드는 방책입니다. 



- 오늘날 왜 시들이 그렇게까지 건조하고 까다롭고 어렵기만 한 겁니까? 그것은 시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책 속에서만 시를 찾고 시를 공부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 자기 혼자서 시인이라 아무리 우겨도 그것은 허공에 내지르는 헛된 메아리와 같은 것일 뿐입니다. 그러기에 시인들은 보다 많은 독자를 의식하면서 시를 써야 합니다. 독자들이 요구하는 시를 써야 하고 독자들에게 필요한 시를 써야 합니다. 그야말로 위로와 축복과 기쁨을 주는 시를 써야 합니다. 인간은 어떠한 경우에도 유용한 것 필요한 것을 찾는 존재입니다. 시도 인간에게 필요하고 유용한 그 무엇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쓰는 시가 이 나라의 중학생이나 평범한 일반 독자들한테 이해되지 않는 시가 되어서 괜찮은 것인가. 오늘날 시인들은 충분히 그들의 시가 어렵고 까다롭다는 것을 자각해야 합니다. 또한 일반 독자들의 현실이나 정서 체계와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말하곤 합니다.

'읽어서 머리 아프고 이해가 안 될뿐더러 우울해지고 마음이 불안해지고 슬퍼지고 괴로워지는 시는 읽지도 말아라. 왜 우리가 사는가? 적어도 인간은 즐겁게 살고 기뻐지기 위해서 산다. 시도 마땅히 우리의 삶에 도움이 되어야지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 시는 필요하지 않다.'



- 사람을 살리는 시가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시와 시인이 설 자리는 없습니다. 

 자화자찬의 시, 허장성세의 거짓 시, 근친혼의 시, 자기 자신도 모르는 언어로 쓰여진 주술과 같은 시로는 안 됩니다.

시인들이여! 부질없이 그대들만 아는 난해와 모순의 돌멩이로 돌담장을 높이높이 쌓지 마십시오. 그럴수록 독자들은 더욱 멀리 달아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야말로 그것은 헛되고 헛된 일생의 허송이며 노로 일 따름입니다.





입말이 시가 된다



-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가운데는 음성언어가 있고 문자언어가 있습니다. 이른바 음성언어는 입으로 직접 하는 말이고, 문자언어는 글로 기록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앞의 것을 '입말'이라고 하고, 뒤의 것을 '글말'이라고도 합니다.



- 50년 가까운 시인 생애 가운데 내가 쓴 후반부의 대다수 시들은 입말을 활용해서 쓴 시들입니다. 주변 사람들의 말과 어법을 차용해서 쓴 시들도 많습니다. 좋은 시, 살아있는 시는 입말 속에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실감한 사람이 바로 납니다. 정말로 좋은 말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런 말을 들려주기도 합니다.

"말조심하세요. 나는 좋은 말이 있으면 훔쳐가기도 하는 말 도둑이랍니다."

그렇습니다. 좋은 시, 살아 숨을 쉬는 시는 글말이 아닌 입말 속에 있습니다. 일상생활의 언어, 우리 삶 속의 언어, 너와 나의 관심사, 평범한 인간의 이야기, 너와 나의 대화 속에 늘 우리가 꿈꾸는 시들이 숨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시란


- 시 쓰기는 또 다른 보물 찾기입니다. 신은 세상 속에 아주 많은 시들을 보물로 숨겨두셨습니다. 그걸 찾으면 되는 겁니다. 나아가 시 쓰기는 발견이기도 합니다. 삶의 발견, 인생의 발견 세상의 발견이 바로 시 쓰기입니다.


- 시는 느끼는 글이고 감정이 글의 주된 바탕이 되며, 감정의 질서를 따라 글이 전개됩니다. 


- 언제부턴가 시 쓰는 분들이 대학교 교수도 하고 평론을 겸하다 보니 시가 감정의 질서보다는 논리의 질서로 많이 다루어지고 있음을 봅니다. 이것은 시작부터 잘못된 일입니다. 어디까지나 교육과 창작, 감상의 현장에서 시는 감정의 질서로 다루어져야 합니다. 결코 학문의 대상이 아니란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시의 무잡성과 건조성은 상당 부분 학문하는 분들과 대학교 교수, 잡지사나 신문사 기자들이 만들어놓았다고 보아야 옳습니다.

  다시금 시를 제 자지로 돌려놓아야 합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시를 감정의 질서로 보고 느끼면서 읽고 쓰고 감상하는 일입니다. 시는 노래와 같은 글입니다. 그림과 같은 글입니다. 노래와 그림을 한 번만 듣고 보고 마는 것이 아니라 여러 번 듣고 보는 것처럼, 시도 여러 번 되풀이하여 읽고 또 읽으면서 느끼고 또 느껴야 합니다. 이럴 때 시가 우리 삶에 도움이 되는 글이 될 것입니다.


- 시는 읽고 나면 무언가 상상이 떠오르는 글입니다. 상상이란 생각 속에 또 다른 그 무엇이 떠오르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미지이고, 그런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 비유이고, 또 비유를 어려운 말로 메타포라 부릅니다.


- 시에 쓰이는 언어는 다분히 모호한 언어, 주관적인 언어입니다. 때로는 모순의 어법, 비문까지도 허용합니다.





그렇다면, 좋은 시란




- 오랜동안의 인생과 세상 경험을 어린아이의 어법으로 천진하게 말하는 것이 바로 시입니다.


- 모름지기 좋은 시란 아무도 모르는 내용, 자기만 아는 말로만 표현된 시가 아니겠지요.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읽고 이해하며 저 맘이 내 맘이야 호응하며 감동을 받는 시일 것입니다. 누구나 다 아는 내용을 썼으되 그 표현이나 언어가 새롭고도 아름다워 스스로 감동할뿐더러 많은 독자를 울리고 감동에 떨게 하는 시가 좋은 시일 것입니다.


- 좋은 시란 좋은 음악을 듣고 좋은 그림을 보는 것 같은 효과도 더불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 읽어서 쉽게 이해되는 시, 인간의 삶에 도움이 되는 시, 나아가 위로와 기쁨과 축복이 되는 시


- 시는 짧고 간결한 글이어야 하고, 힘 있는 글이어야 하고, 값진 글이어야 하고, 마음이 담긴 글이어야만 합니다.





읽고 나서


너무 쉽게 읽혔고, 재미도 있었다.

시라는 게 어렵게 느껴지지 않고,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시인은 난해하고 어려운 시 말고, 쉽지만  마음을 울리는 시인들을 찾아보라고 다독여 주었다.

너무 어려운 시들은 그들만의 잔치를 하기 바빠, 나와 같이 평범한 독자는 소외되고 만다.

시를 잘 모르는 독자들도 잔치를 함께 즐길 수 있도록 배려해주는 시인을 찾아 발걸음을 옮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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