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3일 약속은 취소됐다. P의 딸이 독감에 걸린 것이다. 그게 아녔더래도, 약속 당일 첫째 세연이가 수두 판정을 받아서, 약속은 취소될 터였다.
막상 취소가 되니 홀가분했다. 영등포까지 혼자 두 아이를 태우고 운전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래도 이번 약속을 계기로 운전에 대한 불안과 걱정은 제법 떨쳐냈다. 이게 쉬운 일은 아니다. 난 불안과 걱정이 많은 사람이다. 엄마가 된 후로 더 심해졌다. 일어나지도 않을 일을 미리 염려했고 무서워했다. 운전하다 차가 어디 긁히기라도 하면? 주차를 못해 쩔쩔매면? 주차장이 만차라면? 운전하다 아이가 울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걱정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으며, 언제까지 피할 수도 없는 일임을 받아들이게 됐다. 운전은 내가 헤쳐가야 하는 과제다. 나의 과제는 12월 14일 노량진 수산시장을 시작으로, 12월 24일부터 본격적으로 흘러갔다.(운전이 무서운 엄마#1 참조)
12월 24일 화요일
(둘째를 태우고 부천 ‘이마트 트레이더스’에 다녀오다)
25일 성탄절에 남동생이 오기로 했다. 간만에 오는 동생에게 배달음식을 대접하긴 싫었다. 더군다나 성탄절에 배달은 기본 한 시간. 그렇다고 요리도 못하고, 16개월인 둘째도 돌봐야 하는 내가 거창한 음식을 만든다는 건 무리였다. 쉬우면서도 그럴듯한 요리가 절실했다. 문득 ‘돼지고기 김치찜’이 생각났다. 잘 익은 김치와 돼지고기만 넣고 졸이면 되는 요리! 그래 너로 정했어!
근데 이것만으론 뭔가 부족했다. 얼마 전 부천에 ‘이마트 트레이더스’가 생겼다. 구경 갔다가 스테이크를 싼 가격에 사서 만족스럽게 먹었던 기억이 났다. 스테이크까지 하면 딱이겠는걸. 그러려면 고기를 사야 한다. 당장 내일인데 거기까지 가서 사야 하는 건 누구? 바로 나뿐. 스테이크 말고 다른 걸 할까는 생각도 들었지만, 나도 먹고 싶었고, 도전하고도 싶었다. 신랑에겐 ‘내일 스테이크 먹자. 내가 트레이더스 가서 사 올게’ 배짱 좋게 카톡도 보낸다.
둘째를 카시트에 태우고 시동을 건다. 온몸에 힘이 들어간다. 20분 거리니 부딪혀보자며 입술을 깨문다.
부웅~출발! 세윤이는 가는 내내 운다. 내비게이션을 보랴, 아이를 달래랴. 정신이 하나도 없다. 차를 내팽개치고 도망가고 싶었다. 달래지지 않는 아이를 보며 생각했다. 운전하는 상황에서 아이를 달래는 건 무리라고, 울다 지치면 그만 울거라 여기며 운전에 집중하기로 했다. 헤비메탈이 틀어진 곳에서 수능을 보는 거처럼 쉽진 않았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주차장 입구가 보였다. 결승선이 보이자 휴. 소리가 절로 나왔다. 드디어 도착이다. 평일이라 주차 공간은 여유 있었다. 세윤이는 도착하면서까지도 운다. 시동을 끄고 뒷 좌석 문을 열어주고서야 울음을 그친다. “목도 안 아프냐? 자식아?”라고 말하며 엉덩이를 한 대 때렸다.
후다닥 등심 세 덩이를 사고 집을 향했다. 세윤이는 오는 내내 울어서 그랬는지, 낮잠시간이라 그랬는지, 차를 타자마자 잠들었다. 운전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편안했다. ‘아이만 조용하면 제법 운전할 순 있겠는데?’ 식탁 위에 스테이크를 올렸다. 흡족하게 입 꼬리가 올라간다.
12월 26일 목요일
(두 아이를 데리고 키즈카페를 운전해서 가다)
엄마들에게 가장 무서운 건 아이들의 방학이 아닐까 싶다. 내게도 무서운 방학이 들이닥쳤다. 그것도 오늘부터 1월 5일까지. 장장 11일나! (1월 3일 첫째가 수두 진단을 받아서 방학 아닌 방학이 10일이나 더 늘어났다는 썰.)
방학이라고 아이들과 집에만 있으면 엄마는 배로 힘들어진다. 몸은 힘들어도 외출하는 게 아이도, 엄마도 그나마 편안하다. 더군다나 이틀 전 운전했던 터라 가까운 거리면 아이들을 데리고 다녀 올 수 있겠다 싶었다. 검색했더니 엊그제 다녀온 ‘트레이더스’ 근처에 레이싱 키즈카페 ‘차타타’가 있었다. 주차장에 대한 평을 검색한다. 스크롤을 내린다. ‘평일이면 여유 있게 주차할 수 있어요.’라는 댓글이 눈에 띈다.
첫째는 키즈카페에 간다니 신났다. 둘째는 뭘 아는지 자기 운동화를 들고 내게 와서 신겨 달라고 한다. “그래! 엄마가 좋은데 데리고 가줄게!” 출발하기 전 첫째에게 신신당부한다. “세연아, 엄마가 운전할 땐 말 못 하는 거 알지? 엄마는 운전을 못하니까 집중해야 하거든. 그러니까 엄마한테 말 걸면 안 돼. 알겠지?” 고개를 끄덕끄덕 거린다. 아이 입을 다물 강력한 조력자 태블릿을 첫째 무릎에 올렸다. 첫째와 둘째는 가는 내내 컨디션이 좋다. 주차장도 리뷰대로 여유 있었다.
키즈카페에서 2시간을 놀았다. 시간은 1시 반. 둘째 낮잠시간이다. 차에서 잠투정하면 어쩌지 겁났다. ‘미리 걱정하지 말자. 어찌 되겠지 뭐.’ 5분 정도 운전하자 둘째가 조용히 잠들었다. 와우! 첫째는 태블릿을 보느라 여념 없다. 이제 집에 가서 주차만 잘하면 된다.
미리 걱정했던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 집 골목에 다른 차가 정차해 진입을 못한다거나, 비좁은 골목에서 차가 뒤엉키거나, 주차장이 만차라 곤란한 상황들 말이다. 시동을 끄며 생각했다. 미리 걱정하는 건 나만 피곤해지는 일이라는 걸.
12월 30일(월) ~ 12월 31일(화)
(국립 중앙 어린이 박물관, 국립 한글 박물관을 다녀오다)
신랑은 회사 조직 개편으로 30~31일 쉬게 되었다. 회사에 절이라도 하고 싶었다. 원래대로라면 혼자서 아이들을 데리고 월요일에는 ‘국립 중앙 어린이 박물관’, 화요일에는 ‘국립 한글 박물관’에 다녀오는 모험을 펼치려 했다. 두 곳다 우리 집에서 한 시간 거리. 용산까지 가는 길은 복잡하므로 이 곳만 다녀온다면, 난 어디든 아이들을 데리고 운전할 수 있을 거 같았다. 한편으론 무모하단 생각도 들었다. 두 아이와 한 시간 동안 차 안에 있다는 건 많은 변수가 생기기엔 충분한 시간이니까. 그런 중에 신랑이 쉰다는 말은 힘들 때 내민 시원한 맥주처럼 청량했다.
“여보. 내가 운전할게.” “나야 땡큐지”라며 신랑은 뒷좌석에 앉는다. 함께 할 머리가 하나 더 있으니 힘이 났다. 위풍당당하게 시동을 건다. 운전석 계기판과 카오디오, 에어컨을 포함한 앞좌석 모든 불빛이 깜박깜박거리고, 말의 울음소리처럼 이이이~잉!! 이~이이잉이이이 잉!! 소리를 내며 시동은 걸리다 만다. 순간 내가 뭘 잘못 건들었나 뜨끔했다. 다시 걸어봐도 같았다. 불빛이 미친 듯 깜박거린다. 스릴러 영화의 한 장면처럼.
때마침 이웃이 차를 타려다가 우리를 봤다. “배터리가 나갔나 보네요? 점프 띄어 드릴까요? 제 차에 점프선이 있거든요.” 배터리 점프란, 배터리가 방전된 차량에 다른 차량의 배터리를 연결하여 일시적으로 시동을 걸어주는 방법이다. 다섯 번이나 점프를 띄었지만 시동은 걸리지 않았다. 이웃은 말했다. “전력이 모자라나 봐요. 엑셀을 밟아볼게요. 그때 시동 한번 걸어보실래요?” 부르릉! 여섯 번만에 시동은 걸렸다. (나중에 신랑은 배터리가 방전 된 원인을 알아냈다. 블랙박스 종료 전압이 낮게 설정되어 그랬다는 것. 종료 전압을 높게 변경 한 후로는 시동은 잘 걸린다.) 만약 혼자였다면 어땠을지 생각하니 아찔했다. 신랑은 보험사 긴급출동에 전화를 걸면 5분도 안돼서 기사님이 온다며 걱정할 거 없다고 나를 달랬다.
그래도 두려웠다. 상황이야 맞닥뜨리면 어찌어찌 해결이야 하겠지만, 문제에 돌직구를 맞았을 때의 아찔한 아픔은 어쩔 것인가.
1월 2일 목요일
(첫째 친구까지 태우고 ‘경기도 고양 어린이 박물관’에 가다)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어떤 자신감으로 제안했을까? 첫째 친구 엄마에게 ‘저희 경기도 고양 어린이 박물관 가려는데, 혹시 같이 가실래요?’라고 물은 것이다. 답변은 ‘오! 좋아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렸다. 며칠 운전했다고 도전의식이 뾰족하게 갈아져서 무엇이든 무찌를 수 있을 거 같았나?
그렇게 나는 우리 아이들과 세연이 친구와 그의 엄마. 총 4명을 태우고 운전하게 됐다. 차 안에 탄 아이들은 흥분했다. 목소리가 높아졌고, 쉬지 않고 수다를 떤다.
친구 엄마는 “우아~ 멋져요! 큰 차도 몰고! 무섭지 않아요?” “무섭죠! 부담스럽고요. 그래서 요새 계속 연습하는 중이에요.” “저도 면허증 따야 하는데, 신랑이 계속 따라고 부추겨요.” 면허증 있으면 좋긴 하다는 말을 남긴 채 나는 빨간불일 때만 대화에 응했다. 친구 엄마는 노련하게 ‘겨울왕국2’ OST를 틀며 아이들을 하나로 뭉치게 했다. 아이들은 “인투디안 난~ 인투디안 나~안” 목청껏 부른다. 형과 누나의 열창에도 둘째는 조용히 밖을 응시했다. 어쭈.
박물관에서 아이들은 모든 에너지를 쥐어짜내며 놀았다. 그것도 장장 4시간이나. 운전한 보람이 있었다.
다시 집으로 오는 길. 시간은 어느덧 퇴근시간. 걱정이 앞선다. 차가 많이 막히려나. 내비게이션은 다행히 40분 후 도착이라 알렸다. 친구 엄마가 있으니 아이들을 걱정하진 않아도 될 터였다. 그러나 내비게이션을 잘 못 본탓에 ‘서울 외곽순환도로’로 진입하는 고가차도를 타지 못했다. 당황해서 길을 두 번이나 더 잘못 들었다. 도착 소요시간은 1시간 10분. 30분이나 늘어났다. 가슴이 운전대에 닿을 듯 당겨졌다. 집중하자. 집중하자며 내비게이션을 연신 확인했다. “덕분에 잘 놀았어요!” 친구 엄마가 인사하며 내린다. “뭘요. 다음에 또 가요.” 나는 머쓱 웃었다. 아이들은 피곤한데도 싱글 벙글이다.
운전은 무섭지만 엄마인 내가 용기를 낸다면 아이들에게 보다 넓은 체험을 선사한다. 그래 나도 나지만, 아이들을 위해 운전을 피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운전하면서 걱정했던 일은 생각처럼 일어나지 않았다. 운전 그거 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 같다. 운전이 무섭다고 포기하고 피한다고 나는 자유롭지 않았다. 항상 체한 듯 해결하지 못한 자책이 응어리져 있었다.
걸음마를 떼고, 자전거를 배울 때도 하지 못할 거 같지만 어느새 걷고 달린다. 넘어지고, 엎어지고, 상처 나도 반복해서 한계를 넘다 보니 일상이 된 것이다. 운전도 마찬가지다. 많이 부딪히고 헤쳐나가다 보면 어느새 당연한 일상이 될 것이다. 난 오늘도 둘째를 태우고 운전한다. 점점 일상이 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