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점 세져가는 바람은 그의 눈을 뜨기 힘들게 했고, 앞으로 나아갈 수 없도록 걸어왔던 길로 도로 밀어냈다. 그는 이마가 땅에 닿을 듯 몸을 기울이며 더욱 치열하고 악착같이 나아갔다. 그럴수록 바람은 더욱 거세게 불어왔다. 끝내 한 발씩 한 발씩 뒤로 밀려났고, 점점 꿈에서 멀어지며 털썩 쓰러졌다.
그에게 몰아쳤던 바람은 어느새 티브이 너머 내게로도 불어왔다. 온몸 여기저기에 가려놓은 구멍들 사이로 슝슝 지나며 시리게 했고, 그때의 나와 대면하게 했다.
나도 그 처럼 거친 바람에 털썩 쓰러진 사람이었다.
둘째를 안고 티브이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끌리는 프로그램이 없어 이 채널 저 채널을 방황하다가 평소에 잘 보던 <한끼줍쇼>가 재방송하고 있었다.
'어?! 그레이가 나오네?'
예능에 잘 나오지 않는 그였다. 당연히 시선은 티브이에 꽂혔다. 이경규와 팀을 이룬 그는 실패를 거듭하며 전전하다가 한 끼를 나눠줄 식구를 만났다. 이어서 화면은 한 끼를 나눠 줄 사람의 집안 곳곳을 비췄다. 널찍한 거실과 방, 파란색 벽면에 따스하게 비치는 갈색 조명, 중후하면서도 세련된 인테리어, 곳곳에 보이는 도라에몽들. 그 뒤로는 훈훈한 외모의 한 남자가 부엌에서 대구탕을 끓이고 있었다.
그는 싱글남으로 평소에는 저녁을 해 먹지 않는다며 입을 열었다.
“새해를 맞이해서 그럴듯한 음식을 저에게 대접하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오늘 특별히 대구탕을 끓이고 있었어요.”
요리하느라 분주한 그를 뒤로하고 이경규와 그레이는 집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여기저기를 보다 복층에 들어섰다. 복층은 널찍했고, 방도 여럿 있었지만 껌껌한 어둠과 함께 텅 비어 있었다. 널찍한 복층 집은 화려했지만 한 사람이 살기에는 너무 컸다. 그 집은 회사에서 제공해주는 집이라고 했다. 얼마나 대단한 회사길래 논현동에 널찍한 복층 집을 제공해주는지 궁금했다. 아마도 모두가 알만한 대기업에 다니는 사람이려나...
어느새 밥상은 차려졌다. 서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숟가락을 들었다. 대기업에 종사하는 사람이겠거니 했던 그는 사실 연극 영화 전공이었다. 나는 볼륨을 높혔다. 더군다나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배우로 활동했으며 대학에서 연기를 가르쳤다고 했다. 손담비, 양요섭, 준케이는 그의 제자였다. 그렇지만 지금은 미국계 무역회사를 다니고 있다고. 15년 동안 연기라는 한 길을 묵묵히 걸었던 그였다.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꿈을 향한 간절함만으론 버틸 수 없었다. 영화에 캐스팅되었지만 촬영 직전에 캐스팅 취소 통보를 받기도 했고, 드라마에도 캐스팅됐지만 촬영 전날 취소 통보를 받기도 했다. 그는 점점 지쳐갔고 점차 작아졌다. 그럼에도 주위에서는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는 그를 향해 말했다.
“꿈을 향해 계속 도전하는 네가 정말 멋져!”
그는 버텼다. 그러던 어느 날 멈춰서 자신을 바라봤다. 불효자가 되어 있었고, 형제들에게 늘 도움을 받았으며, 친구들에게도 신세를 지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초라했다. 서러웠다. 슬펐다. 결국 꿈, 행복,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게 된다. 그리고 배우라는 종착점으로 향하던 오랜 행로를 이탈한다. 오래 하던 연기를 그만두니 삶이 공허했다고 한다. 그래서 종종 광고 촬영을 하면서 자신으로 숨을 쉰다고 말하는 그의 얼굴엔 담담한 미소가 번졌다. 무르익은 이야기의 막바지에서 칭찬 타임 코너를 가졌다. 그는 본인을 칭찬하기 위해 입을 연다.
"15년 동안 열심히 연기하며 치열하게 살았던 나를 칭찬해"
그 말을 마친 그는 슬픈 듯하면서도 편안해 보였다. 마치 과거의 사진을 다 보고 앨범을 닫을 때의 여운이 내게 전해졌달까.
나도 10년간 영상이라는 한길만 걸으며 치열하게 살았다. 영상은 삶이었고, 기둥이었고, 나 자신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타이타닉을 보며 영화의 특수효과에 매료된 순간부터 영상이라는 분야와 사랑에 빠졌다. 27살까지 내 삶의 중심은 영상이었다. 정보가 황무지였던 그 시절의 제주도에서 영상이라는 분야에서 일하기 위해 내 상황에 맞게 준비하며 대학을 갔고, 독학을 했고, 졸업 때까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영상과 관련된 기회들을 잡았다. 밤을 새우며 영상 공부하는 것은 희열 그 자체였고, 하나하나 알아갈수록 내 안에는 자존감이 꽉꽉 들어찼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대학을 졸업했다.
마침내 상경해서는 나의 열정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영상 작업도 원 없이 했고, 하고 싶었던 클럽 vjing도 했다. 클럽 동료의 소개로 우리나라 뮤직비디오의 거장이신 홍원기 감독님과도 몇 번 작업하며 영상 소스도 제공했다. 비슷한 시기에 우상이었던 디지페디 뮤직비디오 감독님들과도 연을 이어나가기도 했다.
꿈에 그리던 일들을 하나하나 이루어 내다 보니 세상의 주인공이 된 것만 같았다. 나 자신으로 똑바로 서서 당차게 걸어 나가는 느낌은 참 좋았다. 그러다 무대 영상 회사에 입사했다. 클라이언트들이 원하는 스타일로 영상을 만들어내다 보니 즐거움은 어느새 고역이 되어갔다. 출근하면 다음 날 해가 떠도 언제 퇴근할지 모르는 철야작업은 나의 정신력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흐느적 떨구어버린 정신을 동여맬 시간은 시간의 틈에 짓이겨 주어지지 않았다. 나는 영상을 뽑는 기계처럼 살고 있었다. 조금씩 회의감이 들었다. 절정에 다다랐던 열정의 불씨는 점점 작아졌다.
그러던 어느 날 회사 실장님이 눈에 들어왔다. 실장님은 30대 후반의 남성으로 싱글인데 회사에서 숙박하다시피 했다. 회사에서 일어나 씻고 작업하고, 밥 먹고 미팅 갔다가 와서 다시 작업하고 밥 먹고, 밤을 새우고, 자고, 일어나 씻고 다시 작업했다. 3~4일에 한 번은 집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왔다. 그런 실장님의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새장에 갇힌 새 같아.’
나도 그렇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원하던 삶이 이런 거였나?'
'영상을 했던 이유는 즐겁고 행복했기 때문인데, 지금 나는 행복한가?'
'내가 추구하는 행복은 어떤 거였지?'
'그럼에도 영상을 놓을 수 없는 이유는 뭐야?'
그렇게 반년을 고민했다. 장장 10년을 준비하며 어렵게 여기까지 왔다. 수많은 시간과 노력들로 쌓은 탑을 쉬이 쓰러트릴 순 없었다. 끙끙대며 버텼다. 그럴수록 난 알았다. 어느새 영상은 손목에 채워진 수갑이 되어버렸음을. 참 슬펐다. 몸이 따라주진 않았지만, 눈을 질끈 감고 손에 힘을 뺐고, 꿈은 그 사이로 흘러내렸다. 그 날 이후론 컴퓨터와 영상을 멀리했다.
10년 동안 걸었던 꿈을 현실에 의해서든, 이상에 의해서든, 포기한다는 것은 참으로 허망한 일이다. 내 삶 전체를 흔드는 것과도 같았으니까. 하나의 기둥만 보고 걸었던 발걸음은 방향을 잃었고, 꿈을 향하며 만들어진 습관들은 할 일을 잃고 방황했다. 물론, 삶에는 여유가 생겼지만, 마음에 난 큰 구멍은 어떤 것으로도 매워지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정원규 씨를 보는 내내 마음이 아팠다.
그도 나도행복해지기 위해, 행복을 주던 꿈을 놓아버릴 수밖에 없는 상황은 무어란 말인가. 꿈을 떨쳐내는 시간은 꿈을 향했던 시간만큼 걸렸다. 난 8년이란 시간이 걸렸으니까. 아픔은 세월의 풍화작용을 거치며 깎이고 깎여 작아지고 줄어들다가 흉터로 남았다. 이제야 예전의 일을 말해도 덤덤하다. 많이 늦었지만 꿈을 안고 살았던 10년 동안의 나와 상실감에 허덕이며 괴로워하던 8년 동안의 나를 꼬옥 안아주며 말해주고 싶다.
“10년 동안 꿈을 향해 치열하게 살았던 나를 칭찬해. 그리고 8년 동안 수많은 아픔을 몸서리치도록 받아낸 나를 놓아줄게. 이젠 그만해도 돼. 무너지지 않고 버텨줘서 고맙고 오래 아프게 해서 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