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 그해의 가을

주제_가을, 하면 떠오르는 장면은?

by 금머릿

하얗고 네모난 건물은 분명 삭막했다. 버스정류장에서 한참 오르막길을 걸어야 도착하는 곳. 까만 단화 밑창에 바스락거리는 낙엽이 자꾸 달라붙던 곳. 우리는 그곳을 ‘언덕 위의 정신병원’이라고 부르기도 했고, ‘하얀 감옥’이라고도 불렀다.

고등학교가 무더기로 모여 있는 곳이어서인지, 사람들은 우리 학군을 ‘부산의 8학군’이라 불렀다. 그 의미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냥 거기 속해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 8학군 출신이야’라며 우스갯소리를 하고 다녔더랬다.

지금 돌아보니, 지붕 없는 5층 스카이라운지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뛰어내리면 아플까?’를 무수히 생각했던 곳이었다. 하얗고 네모난 건물 하나와 좁디좁은, 그리고 삭막하기 그지없는 운동장 하나만 덜렁 있는 학교. 잔혹하게도 가파른 언덕 위에 있는 학교여서 주변 학교 학생들로부터 ‘D 여고는 엄지손가락’이라는 불명예를 안겨준 곳.

입시라는 유일한 목표 하나로 모두가 좀비가 되기를 강요당했던 곳. 어떻게 하면 야간자율학습 시간에 빠질 수 있는지, 날마다 그 핑계를 찾던 곳. 도저히 숨이 막혀서 견딜 수 없다 느껴질 때, 마니또가 선물해준 키티 머리 방울로 머리를 묶으며 마음을 달래야 했던 곳.

겨우 그 머리 방울 하나로 마음을 다잡고 간만에 집중하고 있는데, 교칙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뒤에서 풀어버린 어느 교사의 무례함에 온 기분이 잡쳤던 곳. ‘졸업할 때 찾으러 와.’라는 말을 들었지만, 그 얼굴 다시 마주하기 싫어서 그냥 머리 방울을 포기했던 곳.

봄이면 그나마 벚꽃이 피어서, 점심시간, 저녁 시간에 삼삼오오 운동장으로 나와, 산책을 하기도 하고 사진을 찍기도 하고, 별거 아닌 일에 배꼽 잡고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그러나 가을은 중간고사를 앞두고 한숨만 내뿜던 장면만 떠오르니, 씁쓸하다.

그러다 그저께 고 3때 쓰던 다이어리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즐거운 기억으로 가득 찼던 중학교 때와 달리, 어째서 고등학교 때만 떠오르면 우울 모드가 되어 버리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일기의 대부분이 성적에 대한 고민이었다. 친구 관계의 어려움도 만만치 않은 난제였다. 대학에 갈 필요가 없다며, 중간고사 기간에도 공부하지 않는 아들에게 잔소리를 할라치면, 아이는 늘 나에게 물었다. ‘엄마는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


난 진짜 열심히 했다. 그랬다고 생각했다. 미래를 생각하며 열심히 한 기억밖에 없었다. 그런데 과거 나의 다이어리는 내 기억과 다른 기록을 남기고 있었다.


-3일째 독서실을 가지 않았다.

-모의고사에서 외영이 20점 올라서 좋아했는데, 다른 아이들은 50점 올랐단다.

-17명의 급우들에게 담임은 논술을 준비하라고 했다. 나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17등 안에도 들지 못한 내가 너무 한심하다.


엄마의 다이어리를 보던 아들이 킥킥 웃는다. ‘엄마, 엄마도 많이 놀았네.’ 아들의 중간고사가 어제 끝났다. 물끄러미 바라본 내 다이어리. 내 입을 막느라, 어디서 굴러온 낙엽처럼 누군가 눈에 띄는 곳에 갖다 놓은 것만 같다.

“이거 봐봐, 엄마가 그래도 매일 매일 공부 계획을 세웠네.”


반가운 기록이 있어서 열심히 보여주었다. 그런데 아들이 또 웃는다. ‘줄 그은 거 이것밖에 없네. 계획만 세우고 안 했다는 거 아니야?’ 다이어리를 덮었다.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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