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31일 단상
그의 등장
남자는 재활용 뭉치처럼 엎드려 있었다. 문 옆 60번 자리, 그는 한눈에도 노숙자의 행색이었다. 샛노란색이었을 듯싶은 모자는 곳곳에 실밥이 트였는데 누렇게 변해있었고, 기름때가 앉은 빨간 패딩은 검붉은 자국이 보였다. 인호는 상단의 59번과 출력된 종이의 숫자를 확인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 참! 공짜가 없네' 그는 투덜거리며 의자를 고쳐 앉았다. 혹시나 고개를 빼꼼 내밀어 보지만, 자리는 꽉 차 있었다.
인호는 밑을 닦은 휴지를 보듯 남자를 위아래로 흘겨보았다. 그는 두꺼운 감색 코르덴 바지에 하늘색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무채색의 열람실 풍경에서 다채로운 색을 입은 그는 키치적이었다. 인호는 군복을 입지 않은 탈영병을 보듯 노려보았다. 어쩌면 팔과 다리, 머리가 각기 숨을 쉬고 있는 기이한 생명체처럼 보이기도 했다. 재활용 센터 같은 곳에서 이것저것 얻어 입은 것이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남자의 몸에서 낡아버린 옷은 육화 되어, 색의 대비를 기묘하게 소화하고 있었다.
코를 킁킁거려보았지만 역한 냄새는 나지 않았다. 열람실이 오픈한 지 2시간이 넘었기에 다른 이의 속내와 섞여서인지도 모른다. 그는 슬쩍 몸을 기울여 다시 한번 코를 들이댔다. 오랫동안 씻지 않은 노숙자의 짠 냄새 같은 것은 없었다. 다만 뭔가 습기 먹은 낡은 책에서 느껴지는 엷은 냄새가 있었는데, 남자의 것인지 확실하지 않았다.
이어폰을 꽂고 인강을 열었다. 행정법 기본 12강을 30분쯤 듣다가 멈췄다. 집중하려 했지만 평소 같지 않았다. 한 10분쯤 더 듣다가 말고, 첫 강을 열었다. 조현곤은 확신에 찬 어투로 거침없이 쏘아대는 게 특기인 노량진 일타 강사였다. 불편한데 불편하지만은 않은 소위 핵사이다 같은 찌르기가 남달랐다.
"억울하면 강해져야지. 네가 공무원이 돼봐 사람은 얼마든지 생겨. 합격하는 사람이 강한 사람이야."
자기 계발서에서 어딘가에서 본듯한 문장도 그가 말하면 새로웠다. 스스로 채찍질하면 반드시 해낼 수 있는데, 왜 하지 않지? 성공도 실패도 모든 것이 내 책임하에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인호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손을 뻗어 노란색 포스트잇을 꺼내 이렇게 적었다.
억울하면 강해져라!
칸막이 상단에 붙이려다가 멈칫거렸다. 문이 열리며 무채색의 패딩을 입은 남자가 지나갔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 독서대와 칸막이 사이 좁은 틈에 붙였다. 지나다니는 사람이 볼 수 없는, 어두운 공간이 힘 있는 문장으로 바뀐 것에 입꼬리가 올라갔다. 노랗게 빛나는 문구를 다시 읽어보며 우쭐해진 느낌도 든다.
"에너지를 뺏는 사람은 가차 없이 도려내야 해. 그렇지 않으면 도태되는 거야. 더 위너 테익스 잇 올! 이거 다 알잖아!"
The winner takes it all...
그는 문장을 두어 번 읊조리다, 선배를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