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 배우의 표정과 톤만으로도 서로를 이해할 정도로 대본 리딩은 익숙해졌다. 그러나, 낯섦이라는타자성이 물러난 자리에 들어선 것은 아름다움이 아닌, 주체의 정주(定住)이자 안정감이다. 혹시 자기 동일자에게, 반복은 서로의 낯섦만 지워간 것은 아닐까?하마구치 감독의 지배하는 전체성이 오히려 동일성의 고착을 가져온 것은 아닐까? 의문시될 때, 촬영은 시작된다.
수십 번의 대본 리딩에서 금지당했던 것이 카메라 워크와 함께 비로소 시작된다. 감정을 싣고 대사를 하는 순간, 배우 자신이 먼저 알게 된다. 다 이해했다고 생각했던 명증성은 온데간데없이 무화되며, 전혀 다른 성질을 띤다. 이해된 것이, 이해될 수 없는 것으로 다시 멀어진다. 완고한 인식의 껍질에 생긴 균열로 그는 무너져 내린다.
계속 낯선 것으로 도착하는 파토스의 언어는 이미 아는 것임에도, 여전히 비밀이다. 도래함과 동시에먼저 물러나며, 이해할 수 없는 신비로 멀어져 간다.절대적 타자성의 도래는 전체성에게는 축복이자 재앙이다. 타자로의 초월의 가능성이 열리고, 동시에 주체성은 죽음을 선고받는 것이다.
환대를 위한 해체와 재구축은 에로스의 신비이다. 영원 같은 순간, 비로소 멀리서 도착한 아름다움은 날개를 활짝 펼친다. 파토스의 언어 속에 있는 그들을 온전히 감싸안는 것이다.
작은 죽음
작은 죽음(바타유)은 위반이다. 금기를 넘어서는 것은 반체제적이며 모두가 '그곳'을 향하는 위반의 경험이기에 적당함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들의 반복적 과업은 명증적 이해를 갖춘 주체성의 확립이며, 동시에 그 바깥을 향한 것이기도 하다. 이는 사막을 횡단할 수 있는 낙타의 강인함을 갖추는 것이며, 위반하는 전사로서 사자의 정신을 부르는 일이기도 한 것이다.
주체가 지난한 훈련으로 도착할 수 있는 곳은 유한자의 경계까지이다. 울타리를 넘어서는 것은 그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하며, 초월은 반드시 타자성이 도래해야 한다. 낯선 파토스의 언어를 듣는 배우가 자신의 '작은 죽음' 알고 시작한 것이 아니듯, 오랜 과업의 지속은 자신도 알지 못한 것을 생성한다. 각자의 균열 속에 그곳을 향한 신비로운 통로가 열리는 것이다.
불확실성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지향하는 가운데 비로소 멀리서 온 손님은 어느새 도착했다. 순간 무한자와 결합한 유한성은, 가장 낮은 것이 가장 높은 것이 되는 변용을 경험한다. 반항하는 인간이자, 순진무구한 얼굴이 된 그들은 아이처럼 순수하다. 비로소 기억은 망각하는 자유를 획득하고, 절대적 타자성 안에 완전히 새로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