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의 미학」가스통 바슐라르 읽기(11)
3.
아니무스의 불같은 의지는 몰려드는 적을 베고 자른다. 전사의 '반가치'는 지배당하는 것들로부터 노획한 자유를 쏟아낸다. 용솟음치는 붉고 노란 피는 대지에 넘실거린다. 그들의 말인성을 절단하며, 자신을 잊어버리는 도피적 향유. 그의 고양된 감정은 칼과 하나가 되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던 것은 모두 잊어버렸다. 지금 이 순간, 그는 자유다. 누구보다 살아있으며, 전적으로 자기 자신이라고 느낄 뿐이다.
4.
그러나 영원 같던 순간 이후, 느닷없이 낯선 것이 찾아온다. 그의 비의식에 도착한 기이한 손님. 얼굴이 없는 텅 빈 형태. 비어있는 곳에서, 검은 팔다리가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비릿한 피 냄새는 낯설지 않다. 절지류처럼 줄지어 나온 것은 금방 해체되고 다시 기괴한 모양을 갖춘다. 넓은 다발처럼 얽힌 그을린 손과 발. 그위로 자리를 잡는 머리는 수백 개의 서늘한 눈을 뜬다. 아니무스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로 물러선다. 타닥거리는 신음과 고통에 일그러진 것들이 뱀처럼 몸을 꼰다.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 어딘가, 그는 칼을 쥔 손을 놓친다. 끝없이 자기 동일성을 태우는 힘은 사실 그의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