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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을 넘어선 불꽃(2)

「촛불의 미학」가스통 바슐라르 읽기(11)

by 김요섭



Ⅴ.

빛은 불의 초가치화이다. 그것이 초가치화인 것은 우리가 지금 무의미한 것으로 간주하는 사실들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사실 비주네르는 조잡한 불꽃이 흰 불꽃이 되고 흰색이라는 이 지배적인 가치를 정복하기 위해 얼마나 수고하는지 우리로 하여금 느끼게 하고 있다. 이 흰 불꽃은 "다른 쪽 불꽃이 때로는 검게 되었다가 붉은색, 노란색, 남색, 청록, 하늘색이 되는 것과는 달리 변화도 다채로움도 없이 언제나 동일하다."


그리하여 누르스름한 불꽃은 흰 불꽃의 반(反) 가치가 된다. 촛불의 불꽃은 가치와 반가치가 서로 싸우는 폐쇄된 전투장이다. 흰 불꽃이 그것에 자양을 주는 조잡한 것들을 '일소하고 파괴해야'한다.


잘 태우는 것은 높이 타오른다. 의식과 불꽃은 수직성의 동일한 운명을 지니고 있다. 촛불의 단순한 불꽃은 분명히 이 운명을 지시한다. 그것은 "흰색 이외의 다른 색으로는 자신의 희미한 빛을 변화시키지 않은 채 아래에서 자신의 행동을 완수한 후, 저 높은 곳으로 단호하게 올라가서 자기 거처의 본래의 장소로 되돌아가기" 때문이다.

(42~43p)




3.

아니무스의 불같은 의지는 몰려드는 적을 베고 자른다. 전사의 '반가치'는 지배당하는 것들로부터 노획한 자유를 쏟아낸다. 용솟음치는 붉고 노란 피는 대지에 넘실거린다. 그들의 말인성을 절단하며, 자신을 잊어버리는 도피적 향유. 그의 고양된 감정은 칼과 하나가 되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던 것은 모두 잊어버렸다. 지금 이 순간, 그는 자유다. 누구보다 살아있으며, 전적으로 자기 자신이라고 느낄 뿐이다.



4.

그러나 영원 같던 순간 이후, 느닷없이 낯선 것이 찾아온다. 그의 비의식에 도착한 기이한 손님. 얼굴이 없는 텅 빈 형태. 비어있는 곳에서, 검은 팔다리가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비릿한 피 냄새는 낯설지 않다. 절지류처럼 줄지어 나온 것은 금방 해체되고 다시 기괴한 모양을 갖춘다. 넓은 다발처럼 얽힌 그을린 손과 발. 그위로 자리를 잡는 머리는 수백 개의 서늘한 눈을 뜬다. 아니무스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로 물러선다. 타닥거리는 신음과 고통에 일그러진 것들이 뱀처럼 몸을 꼰다.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 어딘가, 그는 칼을 쥔 손을 놓친다. 끝없이 자기 동일성을 태우는 힘은 사실 그의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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