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채는 운무로 덮여 있다. 해자 너머, 문지기가 장검을 들고 강철로 된 성문을 지킨다. 그는 차가운 대지 위에 서서 그곳을 올려다본다. 아득한 느낌이 든다. 문득 '내가 다녀온 곳이 맞던가, 아니 가본 적은 있던가?' 헷갈리기 시작한다. 공중 정원, 느리게 연주되는 하프, 여신의 부드러운 손길은 그저 꿈이었던가? 그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펜을 들어 재빨리 쓴다. 사랑스러운 여인의 밀어와 감미로운 음악이 휘발되기 전, 언어의 옷을 입힌다. 기억의 빈틈과 부재를 그는 치장으로 덧입힌다. '오직 성채의 아름다움을 위해, 사라질 수 없는 그곳을 지키고 싶다'며 그는 자신마저 속인다. 오늘의 언어로 환원된 아름다움은 해독되지 못한다. 빈자리에 정신의 관객이 들어온다. 타자는 도래할 곳을 잃었다. 멀리서 오는 자는 오늘의 언어로 이해되지 않는다.
'우리 시인들 중에서 자신의 포도주에 다른 것을 섞지 않은 자가 있을까? 부드러운 흥분이 찾아오면, 시인들은 언제나 자연 자체가 자신들과 사랑에 빠졌다고 믿는다. 그리고 모든 죽어야 할 운명을 타고난 자들 앞에서 이것을 자랑하고 뽐낸다.' - 니체
그의 여정
나는 죽었다. 그러나 어디에도 호소할 곳은 없다. 내가 죽인 것은 바로 나이기에. 성채 앞에서 누설자의 단죄를 달게 받겠다. 카노사의 굴욕보다 더한 고통을 나는 원한다. 얼어붙은 땅 위에 무릎을 꿇고 죽을지언정 그 자리를 지킬 것이다. 다시 매일, 조금씩 걷는다. 그곳을 향해, 북극성의 그림자의 아래 어딘가를 향해. 나를 찾아야 한다.
'그들의 생각은 충분히 깊지 못했다. 그들의 감정은 심연에까지 가라앉지 못했다.' - 니체
죽어버린 나는, 부패되어 새까맣게 변해버린 혀로 어느새 말하고 있다. 서투르게 누설하고, 어설프게 발설한다. 정신의 관객은 유령마저 유혹한다. 광야의 뜨거운 햇빛에 그는 정신을 잃었다. 어떤 관객도 없는 사막 한가운데에서 홀로 지껄인다. 보아뱀 한 마리가 미끄러지듯 그에게 다가온다. 야윌 대로 야윈 발목을 문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는 사막으로 스러진다.
무한의 음성
그곳에 도착했음을 알았다. 해독되지 않은 독을 몸에 품고도 그는 살아있다. 죽었기에 살아있을 수 있는 비밀을 깨닫는다. 성채의 문지기도 그를 막아서지 않는다. 특별한 비밀을 요구하는 성채는 너무 쉽게 열린다. 그는 더 이상 갈채를 원하지 않는다. 다 이해하지 못해도, 저 별을 향해 계속했던 것은 정신의 관객을 위한 것은 아니다. 반쯤 걸터앉은 자신에게 지쳤고, 자신을 바라보는 별에게도 지쳤다.
그의 심연에서 낯선 얼굴이 떠오른다. 북극성보다 아득히 먼 곳에서 도래한 타자는 말한다. 아름다운 음성은 신비한 목소리로 그에게 현현한다. 알아들을 수 없지만 모든 게 납득된다. 그는 무한의 얼굴을 향한다. 나는 사라지고 멀리서 오는 자가 남았다.
'나는 오늘에 그리고 옛날에 속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나의 내면에는 내일과 모레와 장래에 속하는 것이 들어 있다.' - 니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