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씨의 새해 인사 시리즈 3
작년 12월 31일부터 쓰기 시작한 2020년 새해 인사 시리즈의 마지막 글이다. 첫 번째 글은 2019년 12월 31일, 두 번째 글은 2020년 1월 1일에 썼다. 이제 설을 맞이하여 세 번째 글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1. 시대에 따른 노동의 변화
2. 여유를 찾지 못하면 고통은 계속될 것이다.
3. 간극을 줄이는 것이 ‘성장’이다!
기아와 질병으로부터 어느 정도 해방된 지금, 인류를 가장 괴롭히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간극(차이, gap)'이다. 차이를 느끼지 않는다면 사회적 고통도 느끼지 못한다. 가장 행복한 나라는 가장 부유한 나라가 아니다. 기대와 현실의 간극이 크지 않은 나라다.
TED에서 본 것 같다. 소위 선진국 시민들이 아프리카에서 아디다스 축구공을 만드는 어린이 노동자의 삶을 불쌍하게 여길 필요가 없다는 취지의 발표였던 것 같다. 그 아이들은 기대와 현실의 간극이 만든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오만한 선진국 시민들보다 행복하다. 우리는 그 아이들의 평생 월급을 모아도 자신이 만든 축구공을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예로 들며 자본의 탐욕을 비판하는 동시에 자신의 기준으로 행복을 규정한다. 아프리카의 어린 노동자는 자신이 번 돈으로 부모를 봉양하고, 어린 동생에게 맛있는 과자를 사 주며 지구 상에 있는 그 누구보다 행복하게 살고 있을지 모른다.
다음은 ‘정목 스님’이 말씀하시는 행복을 방해하는 다섯 가지다.
첫 번째, 지레짐작하기
두 번째, 비교하기
세 번째, 이심전심이라고 생각하기
네 번째, 탓 하기
다섯 번째, 완벽주의
행복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상대적인 것이다. 비교할 대상이 없다면 ‘더’ 행복하지도, ‘더’ 불행하지도 않을 수 있다. 나의 행복을 다른 사람이 규정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내가 다른 사람의 행복에 대해 가타부타 오지랖을 부려서도 안된다.
더 늦기 전에 우리는 과거가 아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부합하는 행복과 성장에 대한 개념 정의를 할 필요가 있다. 행복과 성장의 개념을 정의하기 위해선 집단(human)과 개인(private)의 관계를 먼저 살펴야 한다. 행복과 성장의 개념이 달라진 이유의 핵심은 그 기준이 집단에서 개인으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개인은 집단을 통해 자신을 합리화하고,
집단은 그런 개인들로 인해 구조화된다!
- 채희태, “집단과 개인 1” -
집단과 개인은 인류를 구성하는 양면인 동시에 투쟁의 관계이다. 최초 인류는 개인의 생존을 위해 집단을 구성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꽤 오랜 기간 동안 집단은 개인을 억압하는 제도로 작동해 왔다. 최근 들어 문명을 개척해 왔던 집단은 정보력으로 무장한 진보된 개인에게 역사의 주도권을 빼앗긴 것처럼 보인다. 집단의 입장에서 너무 걱정할 일은 아니다. 엉망으로 보일지는 모르지만, 그러한 개인의 집합이 또한 인류라는 집단이기 때문이다.
개인이 집단을 압도하는 시대, 무조건 앞서 나가는 것은 성장이 아니다. 오히려 뒤쳐진 사람들이 따라올 수 있도록 잠시 멈추는 것이 필요하다. 앞서 나가는 사람은 개인보다는 집단을 대표하는 사람이다. 반면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뒤쳐지는 개인은 예전처럼 무능력한 개인이 아니다. 단지 집단의 목표와 다른 목표를 가진 개인일 뿐이다.
또한 지나치게 강한 주장은 오히려 반발력을 키워 역설적인 결과로 이어지는 경우가 더 많다. 역사적으로 주장이 역설적 결과의 원인이 된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중세의 몰락이다. 십자군 원정은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해 교황의 권위를 더욱 확대하기 위해 시작되었지만, 십자군들이 동방에서 가지고 온 문물을 팔아 부를 축적한 시민(상인?)들은 훗날 혁명을 통해 중세를 무너뜨린다.
주장이 역설의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는 시간은 점점 더 짧아지고 있다. 아마도 이 시간의 길이는 정보의 양과 반비례하는 것 같다. 정보가 늘어날수록 역설로 되돌아오는 시간은 짧아진다. 그리하여 역설은 갈수록 ‘찰라’에 수렴될 것이다.
2020년...
주장을 여유로 만들고,
여유를 통해 다양한 간극을 줄여 나가자!
간극이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고 있다면 그 간극을 해소하는 것이야말로 새로운 성장의 개념이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