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 사태 진단하기 6
컵에 물이 반(정도?) 담겨 있다고 할 때, 그 팩트 하나를 가지고 다양한 팩트의 분화가 일어난다.
1. 팩트를 보고 단순하게 물이 아직 반이나 남았다고 이야기하거나, 또는 반밖에 안 남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취향에 입각한 “취향 팩트”
이는 일반적으로 대중들이 취하는 팩트다.
2. “반이나”, 또는 “반밖에”가 자신 또는 자신이 속한 진영의 이익이 걸려 있다면 그것은 “가치 팩트”
진보와 보수, 더민주와 자한당은 팩트에 가치를 부여한 가치 팩트를 주장하고 있는 중이다.
3. 물이 진짜 반이 있는지, 그 반을 넘는지, 아니면 부족한지 따져 봐야 한다고 주장하는 “기계적 팩트”
난 현재 진중권 이 기계적 팩트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애초에 대중들이 가지고 있던 “취향 팩트”는 2, 3번 과 뒤섞이며 각자 자신의 이익과 그리고 자신이 속한 입장과 결합한다. 그리고 주장의 강도와 빈도, 이해관계의 상호작용을 거치는 과정에서 정작 팩트는 사라지고 파편화된 이데올로기가 팩트의 탈을 쓰고 이 사회를 배회한다.
상식에 이어 팩트도 이제 함부로 주장할 수 없는 단어가 되어가고 있다. 이제 상식도, 팩트도 부실한 인간이 제도와 결합해서 만든 사법 권력의 최종 판단에 맡길 수밖에 없게 되었다.
난 일찍이 김영란법이 통과될 때, 이 사회가 조금은 투명해질 수 있을 거라는 기대와 동시에, 법에 대한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아지게 될 상황을 우려했었다. 점점 더 그렇게 되어 가는 것 같다. 법이 아니면 이 복잡한 상황을 정리할 조정자가 이 사회엔 남아있지 않다. 그렇다면 소위 독립된 헌법기관이라고 일컬어지는 사법권력에게 그런 막대한 권한을 ‘위임’해도 될까? 아마도 이러한 상황을 미리 경험한 영미권에서는 사법권력이 시대의 상식과 상호작용할 수 있도록 ‘판례법’을 따르게 한 것은 아닐까? 사법 판단을 내리기 위한 근거인 법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관습(법)에 따를 수밖에 없고, 법이 존재하더라도 이 시대에 맞게 개정되기 전이라면 그것이 10년이든, 20년이든, 아니면 50년 전이든 그 법이 정해진 시대의 상식에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 성문법이 가지는 한계이다. 하루가 다르게 세상이 바뀌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과거의 상식, 또는 과거 권력의 필요성에 의해 만들어진 법에 구속된 채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조국 사태는 수면 아래서 이데올로기가 되어 분화되어 가고 있던 팩트의 문제를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는 역량이 과연 직접민주주의 시대로 나아가고 있는 대한민국의 시민에게, 아니면 권력을 지향하는 모든 이에게 있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