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낭만백수 채희태 Jan 05. 2020

“타는 목마름으로” “노동의 새벽”을 노래하라!

민중가요 이야기 #15

오늘 소개할 노래는  곡이다.  곡을 묶은 이유는 모두 원작시가 있고, 투쟁의 현장보다는 술자리에   어울리는 노래라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타는 목마름으로 유신독재 시절 목숨을 걸고 민주주의를  놓아 부르짖었던 ‘김지하시인의 시를 가락에 얹은 곡이다.

노래가 끝나고 난 후에도 “안녕, 안녕, 군사파쇼여 안녕”으로 이어진다.

민중가요 이야기에 ‘김지하 “타는 목마름으로 소개하는 것에 대해 논란이 있을  있다. 김지하는 1991 강경대 구타치사사건을 계기로 이어진 분신 정국 , 다른 신문도 아닌 ‘조선일보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라는 칼럼을 실으면서 민주화운동 진영에 찬물이 아니라 날 선 얼음을 쏟아부었기 때문이다. 김지하는 그 이후로도 “2009년, 촛불 시위 반대와 고 노무현 대통령 추모객들을 비난하는 행보를 보였으며 2012년,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를 지지한 데 이어 다른 대선 후보를 비난하고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故리영희 교수를 매도해 인터넷에서 "자신에게 씌워졌던 ‘빨갱이’란 누명을 거꾸로 다른 사람에게 씌우고 있다", "유신독재와 박근혜의 나팔수가 됐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위키백과, 김지하).”


난 시대를 반영한 예술작품은 이미 창작자의 손을 떠났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김지하는 유신독재 시절 시의 대가로 권력이나 부를 얻는 대신 목숨을 걸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김지하의 시를 읽으며 그 시대를 견뎠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김지하와 관련된 모든 시대 유산을 반동으로 몰아 역사에 매장한 것에 대해 “꼭 그랬어야 했을까?”라는 의문을 가지고 있다. 물론 1991년, 군사독재의 공안정국에 죽음이 아니면 맞설 수 없었던 그 절박함을 ‘죽음의 굿판’으로 훼손하고 폄하한 것에 대해 나 또한 분노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김지하의 변절과 이미 시대의 소유가 된 그의 시는 분리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난 나와 독립된 사회현상에 대해 비난이나 주장보다는 성찰의 도구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지금 같은 불확실성의 시대엔...

나는 청춘시절 나에게 진정 부끄럽지 않은 오늘을 살고 있을까? 아니면 그때와 달라진 지금의 기준으로 내가 살아온 청춘 시절 모두를 단지 철없던 시절의 치기였다고 부정해야 할까? 난 솔직히 모르겠다. 집단의 생각과 다르면 신념의 마녀사냥을 당해도 되는지...

우리는 모두 자신의 이익을 기준으로 가치를 소비한다. 이러한 현상은 정보 권력을 장착한 개인의 약진을 바탕으로 더욱 심화되고 있다. 최근에 겪은 조국 사태 또한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조국에 대한 가치판단 이전에 조국을 중심으로 한 진영의 논리가 모든 가치를 대체한다. 서강대 사회학과 손호철 교수는 진영이 가치를 잠식한 이러한 현상을 반지성 사회라고 일갈했다. 다시 인류가 암흑의 터널로 진입한 듯한 이 불확실성의 실체에 대해 아직은 그 누구도 확신할 수 없으며, 그 누구의  확신도 믿어서는 안 된다.


https://youtu.be/UyR-L1w6wII

김광석이 부른 “타는 목마름으로”

다음은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이다.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이 발표된 이후 많은 시인들이 붓을 꺾었다는 확인할 수 없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난 국어국문학을 전공했지만, 시는 마치 언어의 가식처럼 느껴져 잘 읽지 않는 편이다. 그런데 박노해의 시는 다르다. 박노해의 시를 읽다 보면 마치 잉크가 아닌 기름이 범벅이 된 피로, 연필이나 붓이 아닌 망치로 쓴 것처럼 살아 움직이는 느낌을 받는다. 내가 시인이었어도 박노해의 시를 읽고 난 후 눈에 보이는 모든 붓을 꺾었을 것 같다.

8번째 마디에 ‘아’는 진짜 소주를 한 번에 털어 넣은 후 불러야 한다.

박노해의 시를 처음 알아본 사람은 나와 종씨로 촌수로는 증조부가 되는 故채광석 시인이다. 시집, “노동의 새벽” 뒤에는 故채광석 시인이 쓴 ‘노동현장의 눈동자’란 해설이 실려 있다. “노동의 새벽”이 세상에 나오게 된 배경에는 위험을 무릅쓴 故채광석 시인의 노력이 있었다. 박노해의 육필원고를 받은 故채광석 시인은 책을 출판하기 위해 출판사를 돌아다녔고, 많은 출판사에서 위험하다는 이유로 거절을 당하던 끝에 풀빛출판사를 만나 “풀빛판화시선”이라는 시리즈를 만들어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故채광석 시인은 압수수색을 피하기 위해 지인에게 박노해의 육필원고를 맡겼는데 1987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하면서 지금은 찾을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내가 채광석 시인의 이름 앞에 고집스럽게 ‘故’를 붙인 이유는 대학 선배 중에도 동명의 시인이 있기 때문이다. 한번은 그 선배가 학원강사를 하던 시절, 한 여학생이 그 채광석이 이 채광석인 줄 알고 “노동의 새벽” 시집을 들고 와 싸인을 부탁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말이 나온 김에 한 마디만 더 덧붙이자면, 대학 시절 많은 사람들이 술자리에서 “노동의 새벽”을 불렀는데, 그중에서도 채광석 선배가 부르는 “노동의 새벽”은 특히 압권이었다. 주로 대중들 앞에서 선동질을 하며 단련된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과장된 바이브레이션을 걸어 대략 1/5음이 샵된 상태에서 부르는 “노동의 새벽”은 남자인 나조차도 가슴을 설레게 했다.


https://youtu.be/UOaCuJwDGzk

인치환이 부른 “노동의 새벽”

많은 민중가요들이 자신의 소임을 다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갔다. 하지만 아직도 그 쓸모가 남아 있는 민중가요도 많이 있다. 민주주의와 노동의 문제가 여전히 우리의 과제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사실 민주주의와 노동은 인류가 사라지기 전까지는 영원한 모순으로 남아있을지 모른다. 굳이 술자리가 마련되지 않더라도 그 가사를 곱씹아 보며 “타는 목마름으로 노동의 새벽”을 한번 불러보면 어떨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