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가요 이야기 #18
작곡자가 누군지 확인할 수 없는 많은 민중가요들이 있다. 내가 대학에 입학한 1988년 이미 “농민가”가 있었고, “반전반핵가”가 있었고, “동지가”가 있었다. 그리고 오늘 소개할 “어머니”라는 노래도 이미 있었다. 곡의 완성도를 보면 그저 구전된 민중가요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 당시에는 누가 그 노래들을 작곡했는지 알 수도 없었고, 굳이 알려고 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시간이 지나고 "농민가"는 김대중 정부 시절 농림부 장관을 지냈던 '김성훈' 교수가 작사를 해 동아리에서 부른 것이 시초가 되었고, "반전반핵가"는 서울대 노래패 '메아리'의 '박치음'이 1986년 작곡했고, "동지가"는 1985년 경 전남대 '박철환'이 작곡했다는 것이 알려졌다. 앞서 '김호철'과 '윤민석'이 민중가요의 전성기를 이끌었다는 글을 쓴 바 있다. 말이 나온 김에 민중가요의 시작부터 그 발전의 과정을 간략하게 짚어보겠다. 물론 학문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필자의 주관적 견해일 뿐이다.
대한민국의 Rock이 용산에 있던 미8군 연예단에서 연주를 했던 '신중현'에 의해 시작되었다면, 대한민국의 민중가요는 민주주의의 암흑기인 유신시절, 김민기에 의해 태동되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김민기는 그저 지식인의 고뇌를 노래에 담았을 뿐, 구체적인 목적을 가지고 창작된 이후의 민중가요와는 분명하게 구분이 된다. 언젠가 김민기는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대중들이 자신이 만든 "아침이슬"을 떼창하는 모습을 보며 (부정적인?) 소름이 끼쳤다고 밝힌 바 있다. 김민기의 의도와 무관하게 유신 암흑기를 보냈던 많은 지식인들은 김민기의 "친구", "작은 연못", "아하, 누가 그렇게", "상록수" 등을 부르며 시대의 고통을 견뎠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은 민중가요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운동성'이라는 구체적인 목적을 가진 민중가요들이 하나, 둘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임을 위한 행진곡" 탄생했고, 노래모임 '새벽'이 활동을 하며 민중가요의 전성기를 준비했다. 그리고 작사•작곡자의 이름을 걸고 민중가요가 본격적으로 생산되는 전성기는 대략 1989년부터이다. 민중가요가 대중화된 시대적 배경은 1987년 6•10 민주항쟁으로 인해 투쟁의 방식이 결사된 소수의 선도투쟁에서 많은 대중들이 참여하는 대중투쟁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 후 1992년 문민정부의 출범으로 다양한 주제와 형태로 확산된 민중가요는 1996년 연대사태(연대항쟁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광주민주화항쟁처럼 명확한 역사적 평가가 이루어지지 않아 중립적 용어인 사태라고 표현하였다.)를 통한 학생운동의 몰락(?)과 함께 긴 침체기에 돌입한다.
다시 오늘 소개할 민중가요 "어머니"로 돌아오자, "어머니"는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인 '故이소선' 여사에게 헌정된 노래로 알려져 있다. 故노무현 대통령이 "상록수"와 함께 즐겨 부르던 노래로 "사람 사는 세상"이라는 표어도 노래 "어머니"의 가사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필자는 주로 내년에 30주기가 되는 김귀정 열사 추모제에 참석하신 어머니가 소개될 때 이 노래를 불렀던 것 같다. 노래를 부르다 보면 목이 메어 끝에는 노래가 아닌 반은 울음이 된다.
"어머니"의 제목 뒤에 숫자 1이 붙은 이유는 윤민석(선배)이 작곡한 "어머니2"라는 노래가 있기 때문이다. 민중가요에는 "어머니" 외에도 같은 제목의 노래들이 많이 있다. 앞에 연재한 "지리산"은 안치환의 "지리산, 너 지리산이여"를 포함해 3곡의 노래가 있고, "오월의 노래"도 노래 뒤에 1, 2, 3이 붙는다. 그리고 노래 "꽃다지"도 이호철의 "꽃다지1"과 윤민석의 "꽃다지2", 그리고 "바위처럼"을 작곡한 '유인혁'의 "꽃다지3"이 있다. 특히 "꽃다지" 시리즈는 민중가요의 전성기를 이끈 세 거장의 독특한 매력이 노래에 녹아 있어 연재에 포함시킬 계획이었는데, 안타깝게도 "the 청춘"의 공식 연재에서는 다루지 못할 것 같다.
글을 맺으며 마지막으로 故노무현 대통령님이 부르신 “어머니”를 들어보자.
https://www.youtube.com/watch?v=4eIwVf56-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