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의 사회학 #7
3. 경제성장률(GDP)의 함정과 신자유주의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를 가장 포괄적으로 규정하는 단어는 아마도 “신자유주의“가 아닐까? 새롭다는 것도 좋고, 자유주의라고 하니 더욱 좋아 보인다. 거기다 신자유주의는 세계를 하나로 연결하는 소위 세계화(globalization)를 지향한다고 하니 세상에 이보다 좋은 게 또 있을까 싶다. 세상에 있는 좋은 말이라는 좋은 말은 다 가지고 와 신자유주의의 포장지로 사용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거부감이 크지 않다. 하지만 세계화라는 단어 앞에 생략된 것이 있는데, 신자유주의가 지향하는 세계화는 바로 자본의 세계화(globalization of capital)다. 신자유주의를 통해 우리는 세계를 동경하며 고향을 등졌고, 추억이 묻어있는 골목까지 지워 버렸다.
최근 들어 여러 차례의 금융위기와 팬데믹을 거치며 세계화에 대한 회의가 서서히 일기 시작했다. 영국이 유럽연합에서 탈퇴하는 ‘브렉시트’를 투표를 통해 결정한 것이 그 첫 번째고,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운 트럼프가 미국의 대통령으로 당선된 것이 그 두 번째 조짐이다. 그리고 우리는 ‘응답하라 1988’이라는 드러마를 통해 아무런 의심 없이 부르짖었던 세계화가 지워버린 것이 무엇인지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경제의 파이를 계속 확대해 왔다. 소위 경제성장률(GDP)이라는 수치를 통해 늘어난 파이를 비교하며 끊임없이 국가를, 기업을, 개인을 경쟁으로 몰아간다. 자본주의는 생산을 통해 부가가치를 창출한다. 빵을 100개 생산하는 기업은 빵의 생산량을 200개, 300개로 늘려야 성장을 할 수 있다. 인구가 늘지 않는다면 한 사람이 더 많은 빵을 먹어야 하는데, 인간의 위가 아무리 커져도 먹을 수 있는 빵의 양은 한계가 있다. 심지어 성장할 만큼 성장한 대부분의 선진국들은 오히려 인구가 줄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고령화 사회로 빠르게 진입하고 있다. 이렇게 생산을 통한 부가가치의 창출이 한계에 다다르면 가치를 상승시키는 것이 경제성장률을 높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된다. 평당 100만 원 하던 땅이 1,000만 원이 되면 늘어난 땅의 가치가 돌고돌아 경제성장률에 반영된다. 이러한 가치의 변화는 곧바로 양극화로 이어진다. 경제성장률이 높으면 높을수록 아이러니하게 부의 양극화가 심화되는 악순환에 빠지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소위 신자유주의 경제 질서이다.
신자유주의의 첨병이라는 IMF에서도 부유층의 부유해져야 그 부가 저소득층으로 흘러 넘쳐 경제가 성장한다는 소위 낙수효과를 부정하고 나섰다. 2015년 IMF는 150여 개국의 경제 지표를 분석한 결과, 상위 20% 계층의 소득이 1% 포인트 증가하면 이후 5년의 성장이 연평균 0.08% 포인트 감소하며, 하위 20%의 소득이 1% 포인트 늘어나면 같은 기간의 성장이 연평균 0.38% 포인트 확대된다고 밝혔다. 또한 IMF는 "우리의 결론은 하위 계층의 소득을 늘리고, 중산층을 유지하는 것이 성장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신자유주의라는 솥에서 느긋하게 싸우나를 즐기던 개구리가 코로나로 인해 갑자기 솥이 뜨거워지자 화들짝 놀라 솥에서 빠져나왔다. 솥에서 나온 개구리는 이제 신자유주의를 제대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코로나가 촉매가 되었을 뿐, 4차 산업혁명 등으로 인해 새로운 질서가 필요하다는 인식은 이미 “뉴 노멀(New Normal : 새로운 생활표준)이라는 이름으로 경제 분야를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었다. 그렇다면 앞으로 닥쳐올 미래는 과거와 어떻게 다를까? 불확실한 미래를 누가 감히 예측할 수 있겠는가? 뉴 노멀 시대를 예측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온 모든 것을 의심하는 것이다. 니체가 중세의 질서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신의 존재를 의심한 것처럼...
코로나가 지나가면 세계는 어디로 향할까?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 이전으로는 다시 돌아갈 수 없을 거라고 이야기한다. 다시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간다고? 인간은 가끔 현실이 고통스러우면 과거가 행복했다고 착각을 하기도 한다. 신나서 군대 이야기를 떠든다고 다시 군대에 가고 싶은 남자가 있을까? 태극기를 들고 광화문으로 나온다고 어르신들이 유신독재의 그 암울한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은 아니다. 아르신들은 단지 현실의 물리적 빈곤과 심리적 배제가 고통스로울 뿐이다. 이제는 향수가 되어버린 코로나 이전의 삶이 과연 행복하기만 했을까? 코로나가 고통스럽다고 그 이전으로 반드시 되돌아갈 필요는 없다. 아니 오히려 코로나로 인해 우리는 그동안 보지 못했던 많은 것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 신자유주의를 비판해온 영국 캠브릿지 대학의 장하준 교수는 코로나로 인해 미국에서는 에센셜 임플로이(essential-employees), 영국에서는 키 워커(key-worker)라고 부르는 사람들이야말로 모두가 생존하는 데 기본이 되는 필수 노동을 해 왔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록다운 속에서 이런 말들이 나와요.
‘이제 보니 은행투자자는 없어도 살 수 있지만,
의료진, 음식 파는 가게 직원, 배달노동자, 양로원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없으면 못 살겠구나!’
이제 우리는 소비주도 성장에서 소득이 주도하는 성장으로, 자본의 이윤이 지배했던 사회에서 시민이 연대하며 협력하는 사회로 나아가면 된다. 물리적 거리는 유지하되, 심리적 거리를 줄여가며... 바로 지구가 코로나라는 백신을 통해 우리에게 일러준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