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좀 많네요...
다양한 영화 장르가 있다. 멜로, 코미디, 호러, SF, 그리고 좀비...
내가 인상 깊게 본 좀비 영화는 레지던트 이블과 웜 바디스, 그리고 최근에 본 부산행이다. 그 외에도 본 좀비 영화가 없지는 않으나 아마도 내 기억에 남아 있지 않은 이유는 영화와 현실과의 개연성이 다소 떨어지기 때문인 것 같다.
레지던트 이블은 밀라 요보비치의 매력이 쩔기도 하지만, 다국적 방위 산업체 엄브렐러가 생체 생화학 무기인 앨리스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좀비들이 등장하게 된다는 현실과의 개연성이 깔려있다.
웜 바디스에서는 기존의 좀비 영화와는 다소 다른 각도로 좀비를 조망한다. 인간의 입장에서 좀비를 악마화시킨 것이 아니라 좀비 입장에서 인간을 바란본다. 다소 코믹스럽긴 하지만 웜 바디스는 인간 중심의 사고를 뒤엎는 의외성이 현실과의 개연성을 담당한다.
마지막으로 가장 최근에 본 부산행은 '돼지의 왕'과 '사이비'를 연출한 연상호 감독의 사회를 바라보는 문제의식이 다른 주제들(우리 은슈를 펑펑 울게 한 공유의 부정(父情), 좀비를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불신, 좀비물 특유의 끔찍한 볼거리 등...)에 비해 다소 밀려나 있기는 하지만 마지막 장면에 현실 개연성이 충분한 제법 묵직한 메시지를 던진다. 부산행의 프리퀄 격인 애니메이션 ‘서울역’에서 다뤄질 것으로 예상되는 좀비 발생 원인에 대한 암시가 바로 그것이다.
능력있는 펀드매니저로 분한 공유는 자신(회사?)이 손해를 입지 않기 위해 문제가 있는 회사를 소위 작전을 통해 살려내는데, 그 회사에서 발생한 사고가 좀비 발생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펀드매니저는 회사의 도덕성을 보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회사가 자신에게 이윤을 가져다 주느냐, 아니면 손해를 입히느냐이다.
내가 어공으로 일을 하면서 만난 모든 민원인들의 공통점은 자신은 절대 손해를 보지 않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 심정 이해가 가고도 남음이 있다. 나의 손해가 공익이 아닌, 누군가의 사익이 되는 상황이 지속적으로 반복된다면 미치지 않고서야 누가, 왜 자신의 손해를 감수하겠는가!
이러한 손해의 의미보다 더 큰 문제는 바로 손해의 크기이다.
사소한 손해도 감수하지 않으려는 태도는 내가 손해를 감수하지 않음으로 인해 발생하는 누군가의 피해 또한 아랑곳하지 않겠다는 태도로 이어진다. 이러한 태도는 사실 우리에게 매우 익숙하다. 독재자는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기도 하며, 때로는 무고한 시민을 학살하기도 한다. 어쩌면 권력자는 수백, 수만 명의 생명보다 자신의 사소한 감정적 손해의 크기가 더 크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그런 만행을…
과거에는 주로 물리적 힘의 형태로 존재하던 권력의 자리를 지금은 돈이 자치하고 있다.
힘의 권력은 소수로 구성되어 있는 지배자의 논리에 피지배자들이 복종하거나 또는 저항하는 수직적 성향이 강하지만, 돈이 만든 권력은 그 많고 적음에 따른 수직적 성향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돈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지키려고 하는 수평적 성향이 더해졌다.
수직적인 권력 관계는 투쟁을 통해 해결할 수도 있을지 모르나, 수평적 이해 관계는 투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소위 신자유주의라고 불리는 말기 자본주의의 특징이다. 초기 자본주의 시대의 문제를 진단했던 마르크스의 처방전이 아직도 유효하기는 하지만, 교조적으로 맹신할 수는 없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아홉 수...
서른을 코 앞 둔 스물 아홉살 때 난 내 자신의 존재 이유에 대해 깊은 고민에 빠졌었다. 나이 서른에 자살을 하겠다는 십대 시절 다짐이 떠오르기도 했고, - 십대가 생각하는 나이 서른은 삶의 의미가 없는 나이였던 것 같다. 요절한 천재들에 대한 동경도 있었던 거 같고... - 연애도 안(못)하고 주로 후배들 뒤치다꺼리를 하며 이십대를 보냈는데, 그 후배들이 하나, 둘 지 짝을 찾아가는 걸 보고 인생의 무상함을 느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때 난 생각했다. 내가 나쁜 짓을 하고 돌아와도 나를 이해하고 품어줄 수 있는 가족 이외의 단 한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죽어라 소개팅을 해서 만난 사람이 지금의 은기엄마다.
사십을 바라본 아홉수인 서른 아홉살 때는 아무 생각 없이 보낸 것 같다. 그때는 오롯이 나만 바라봐 주는 은기와 은슈가 있었으므로...
마흔 아홉... 오십을 몇 달 앞 둔 지금 다시 스물 아홉 때 느꼈던 묘한 허전함이 다시금 나를 불안하게 만든다.
신데렐라와 네남잔가 하는 드라마를 보며 왜 아빠는 재벌이 못 되었냐는 아이들의 진심일지도 모를 투덜거림에 서운함을 느껴서일까? 모처럼만의 가족과 함께하는 연휴에 아침부터 땀을 삐질삐질 흘려가며 누룽지에, 김치찌개에, 계란말이에, 오이냉국을 인터넷 레시피를 보며 해다 바쳤는데, 마누라는 "설거지도 자기가 할 거지?" 익숙하지 않은 요리질에 주방이 난장판이 되었으므로, 난 당연히 설거지를 포함한 뒤처리까지 할 생각이었다. 설거지를 마치자 한참을 뒹굴거리며 TV를 보던 아이들은 "아빠, 배고파. 라면 끓여줘."
그래, 나의 악행까지 이해하고 품어주는 건 바라지도 않는다. 지금 바람은 그저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만 되지 않는 것...
또다시 난 서럽고, 힘들고, 외로운 아홉 수를 보내고 있다. 첫번째 찾아온 아홉 수는 달달한 연애와 결혼으로 이겨냈지만, 지금은 솔직히 죽음 외에 다른 대안이 보이질 않는다.
그냥... 그렇다는 거다. 설마 내가 자살이야 하겠는가...
나를 대신해 담배만 몇 대 죽이고, 라면을 끓이기 위해 다시 집으로 들어간다.
유재석이 아이들에게 잔소리와 충고의 차이를 물었다. 아이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잔소리는 왠지 모르게 기분 나쁜데, 충고는 더 기분 나빠요.
평소 존경해마지 않던 선배님(?)으로부터 얼마전 통과된 석사 논문에 대한 평을 들었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가슴이 베인 듯 아팠지만, 그 칼날에 애정이 배어 있음을 알기에 동시에 아픔이 치유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사실... 이전엔 그 선배님에 대한 나의 존경심을 살짝 의심을 한 적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이젠 그 선배님을 어떠한 의심도 없이 존경할 수 있게 되었다. 앞으로 평생 쫓아다니며 더 아픈 말씀을 해 달라고 졸라야겠다.
다음은 선배님의 평을 메모한 후 요약한 내용이다.
1. 말투가 장황하고, 논문답지 못하다. 논문에서는 핵심만 간결하게 전달하는 것이 필요하다. 보다 학술적인 표현으로 정제할 필요가 있다.
2. 본론에 비해 혁신교육지구에 대한 설명이 길다. 제목을 본 독자들은 혁신교육지구보다 교육 거버넌스의 갈등 사례를 궁금해 한다.
3. 교육에 대한 문제의식 등 평소 고민을 논문에 장황하게 늘어놓은 것은 사족으로 보인다. 아는 걸 다 풀어놓은 것 같은 느낌?
4. 개념에 대한 조작적 개념 정의가 부족하다. 갈등, 거버넌스 등 키워드에 대한 개념 정의 및 선행 연구에 대한 충분한 검토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논문을 통해 무언가 확실한 논증을 했다기 보다는 안개속을 헤매는 느낌이었다.
5. 참고 문헌을 무시하면 안된다. 참고 문헌 목록에서 논증을 뒷받침만할 풍부함과 깊이를 찾지 못했다.
6. 제언이 붕 떴다. 결론은 본문의 내용에서 한발짝 더 나아가야 하는데, 하늘로 붕 날아간 느낌이다. 이를테면 본론에서 살피지 못한 내용에 대해서 후속 연구의 필요성을 언급했어야 했다.
7. 인터뷰와 개인의 의견을 뒤섞지 않아야 한다. 사전 논의에 대한 연구와 본인의 이야기를 분리할 필요가 있다.
8. 전체적으로 논문이 너무 거칠다.
9. 내용이 너무 브로드하다. 학술 논문은 좁아야 한다.
10. 하나를 알게 되면 모르는 아홉 가지가 생기는 법이다. 겸손함이 부족하다.
11. 논문스러움을 제거하고 책으로 낸다면 잘 팔릴 거 같다.
나도 세월의 연륜이 더해지면, 이 선배님처럼 핵심을 찌르는 촌철같은 조언을, 그것도 담백한 애정을 담아 누군가에게 해 줄 수 있게 될까?
나는…
고집을 흔들어 놓고 싶은 고집이 있는 것 같다.
근데…
이 고집도 이제 버려야겠다.
도가 아니라
돌을 닦으며 얻은 깨달음?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나 하나 바꾸는 것밖에 없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