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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der Oct 16. 2023

실리콘밸리 번아웃

우리는 조용한 사임으로 전환 중

지난번 재택근무에 관한 글을 썼을 때 잠깐 번아웃에 관해서 소개한 적이 있다. 코로나가 끝나고 나서부터 여기저기서 번아웃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었다. 처음에는 의료종사자들 번아웃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나오더니, 언젠가부터는 번아웃이 코로나처럼 모든 사람을 감염시켰다.


실리콘밸리에서도 번아웃이란 말은 아주 캐주얼하게 쓰였다. 한 1 - 2년 전과 다른 것은, 아직도 정리해고 바람이 끝나지 않아서 번아웃이라고 본인이 자발적으로 그만두는 사람들이 요즘엔 많지 않다. 내 회사 친구 중에도 1년 전에 번아웃을 이유로 회사를 야심 차게 그만두고 요즘은 후회한다고 연락을 자주 한다. 새 직장 잡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아서 그렇다.

그러면 번아웃한 사람들은 요즘 어떻게 지내지?
Quiet quitting - 조용한 사임을 하고 있겠지


오늘은 최근 사람들이 많이 언급하는 번아웃에 관해서 이야기하려 한다. 대량의 정리해고가 아직까지도 심심치 않게 들리는 요즘, 실리콘밸리에서는 번아웃의 트렌드가 어떻게 달라졌는지에 초점을 맞춰서 이야기를 시작해 보겠다.


번아웃은 왜?

생각보다 번아웃의 이유가 복잡하다. 우선 번아웃에 대한 몇 가지 잘못된 통념들부터 짚어보자. 보통 사람들이 번아웃이라고 하면, 이런 경우들을 떠올린다

업무량이 너무 많다

업무 성과 부담 또는 상사에게 시달린다

쉴 시간도 없이 피곤해서 죽을 거 같다

이래서 보통 번아웃이라고 하면, "좀 쉬다 와라." 아니면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을 좀 찾아봐라." 또는 "회사일 말고 취미나 본인에게 의미 있는 일을 좀 찾아보라"라고 권유한다. 많은 전문가들, 특히 정신과 의사들도 번아웃이라고 하면 이렇게 충고한다.

번아웃을 다르게 정의한다.

Impact Player라는 책을 쓴 Liz Wiseman은 번아웃에 시달리는 많은 사람들과 인터뷰를 하고 번아웃의 원인과 치료법을 다르게 정의했다. 실제로 번아웃에 걸린 많은 사람들이 일이 너무 많고 힘들어서 지친 상태가 아니라, 오랫동안 본인이 또는 본인이 하는 일이 전혀 영향력이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는 아무도 아니야.
내가 하는 일은 아무 의미도 없어.
나 같은 놈이 뭘 해봤자 달라질 것은 없어.

이런 생각들이 사람들을 진 빠지게 하고, 이불속에서 나오지 못할 만큼 지치게 한다는 것이다.


내가 본 번아웃들

앞서 말했던 나와 함께 일하던 친구는 같은 팀에서 4년을 일하고 어느 날 선뜻 사직서를 던졌다. 더 이상 못하겠다더라. 나와 친하기도 했고, 또 성과도 좋은 직원이라서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너무 놀랐다. 속으로는 "배부른 소리 하고 있네."라는 생각도 솔직히 했다. 그렇게 힘든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좋은 직장을 그만두겠다고? 그냥 좀 쉬고 재충전하면 안 되나? 그런 생각이 들었고 그렇게 묻기도 했다. 그랬더니 그냥 좀 쉬는 것 같고는 안될 것 같다고, 그만두고 나중에 다시 일을 시작하겠다면서 단방에 4년을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었다.


또 다른 나랑 오래부터 알고 지내는 친한 친구는 메타, 애플을 거쳐서 요즘은 가장 잘 나간다는 무인자동차 회사에서 꽤 높은 레벨 엔지니어로 근무한다. 워낙 똑똑하고 다른 사람들과 잘 지내서 회사 내 친구들도 많은 친구다. 그런데 한 2년 전부터 계속 만날 때마다 실리콘밸리가 지겹다고 노래를 부른다. 다시 대학으로 가서 공부할까? 아니면 그냥 한 1년 정도 그냥 놀아볼까? 고민만 2년째다.


"회사일은 그럭저럭 하는 거야?" 물으면 "주에 한 3시간쯤 일해." 이렇게 대답한다.

"뭐야, 이 자식. 정말 신의 직장에 다니잖아." 내가 그러면 슬그머니 웃는다. 그의 말에 따르면 자기네 팀의 반 이상이 거의 Quiet Quitting을 하고 있다고 한다. 한마디로 일 하는척하고 거의 아무도 일 안 한다는 것. 매니저도 마찬가지. 다들 조금씩 꼭 해야 할 일만 겨우 하고, 그냥 조용히 회사를 다니고 있단다. 요즘 무인 자동차가 워낙 언론의 큰 관심을 받고 투자자들이 물밀듯이 들어오니, 한 두 부서쯤 일 안 해도 그냥 굴러가나 보다.


이런 상황이 부러운 것 같지만, 본인의 입장에서는 좋지만은 않단다. 일 안 하고 월급 받는 죄책감도 있고, 또 무엇보다 본인의 인생이 허무하게 흘러가는 것 같아서 속 상하기도 하고, 그만두자니 딱히 뭐 할 만한 것은 없고.. 다른 직장을 찾자니 지금 고용시장은 좋지 않고.


배부른 소리처럼 들려도 실리콘밸리라는 화려한 감옥에 갇혀버린 사람들이 꽤 있다. 내 친구는 본인은 쳇바퀴를 돌리는 뚱뚱한 쥐가 된 것 같다고 한다.


은근히 정리해고를 꿈꾼다

요즘처럼 고용시장이 좋지 않은 실리콘밸리에서 번아웃이라는 말은 공식적으로는 거의 들어간 상태다. 친구들끼리는 허물없이 너도나도 번아웃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매니저와의 상담이나 회사 안에서는 번아웃이란 단어를 쓰는 것을 꺼린다. 다음에 있을 정리해고들이 두려워서 그런다.


반대로 차라리 정리해고 당했으면 하고 은근히 바라는 사람들도 꽤 있다.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자기가 그만둘 자신이 없어서다. 생각보다 사직서 쓰기가 쉽지 않다. 후회하지는 않을까? 다시 직장을 가지로 싶을 때 가질 수 있을까? 고용시장은 좀 나아질까? 경제는 좀 안정이 될까? 어느 하나 대답이 똑 부러지게 나오지 않는 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사직서 멋지게 쓰고 나가려는 이가 많지 않다. 실제로 최근 6개월간 자기 의지로 회사를 그만둔 사례가 우리 회사 같은 경우 딱 2명이다. 그것도 나이 50이 넘어서 정년퇴직한 고위급 관리자들의 사례였다.


둘째는 퇴직금 때문이다. 자기가 자발적으로 나가면 회사에서 주는 돈은 땡전하나 없다. 그러나 정리해고당하면 지난번 정리해고 퇴직금에서 자세히 설명했듯 최소한 몇 달간의 월급과 의료보험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더 정리해고 당하기를 은근히 바란다.


이러한 이유들로 번아웃 한 사람들이 요즘 더 Quiet Quitting, 조용한 사임을 한다.

그냥저냥 최소한의 일만 하다가 다음에 정리해고 당하려고.

솔직히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 요즘 주위에 정말 많아졌다. 수년간 일해서 통장에 몇 달 버틸 정도는 있지만 사직서 낼 배짱은 없고, 실리콘밸리 떠나고 싶어도 막상 나갈만한 동기는 딱히 없고, 게다가 요즘은 어디서 정리해고 당해도 실력 없는 놈이라고 욕 안 하겠다, 그래서 누군가가 돈 봉투 쥐어주고 나가라고 해주기를 바라는 거다. 


번아웃을 이겨내는 법

앞서서 소개한 책 Impact Player는 현대 사회의 번아웃에 관해 다시 정의한다. 죽을 만큼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은 과로사하지, 번아웃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렇게 번아웃을 다시 정의하면, 치료법 또는 대처도 다르다. 휴가, 취미생활 등은 절대로 번아웃의 치료가 될 수 없다. 그냥 응급처치일 뿐이다.


책에서는 여러 가지 예시로 번아웃을 이겨내고 Impact Player, 즉 영향력 있는 조직의 리더가 되는 방법을 야심 차게 소개한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더 이상 영향력 없는 일에 붙들여 매 있지 말고, 불이 있는 데로 뛰어들어라. '뭐든 가장 크고 의미 있는 일에 참여해서 내가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줘라'는 내용이다. 일도 그냥 무작정 열심히 하는 게 아니라 "스마트"하게 해라. 항상 어떻게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말한 일을 할 수 있을까 를 고민해라.


난 사실 중간쯤 읽다가 집어치웠다. 번아웃이라는 무기력한 상태를 경험하는 사람들에게 회사에게 뭘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라고? 불나방처럼 가장 크고 사람들의 관심이 제일 큰 일에 뛰어들라고? 이 작가 회사생활 한 번이라도 해 본거야? 갑자기 무슨 리더십 트레이닝에 온 것 같은 작가의 충고들이 속을 뒤틀리게 했다.


나는 전문가는 아님으로 감히 번아웃을 이겨내는 법을 말할 수는 없겠다. 그렇지만, 솔직하게 "내가 하는 일이 임팩트가 없어서 요즘 일이 재미가 없고 무력해졌다." 정도는 매니저와 상담해 볼 만하겠다. 굳이 번아웃이라는 거창한 단어를 쓸 필요도 없을 것 같다.


가만히 않아서 내가 행복하지 않은 이유, 내가 왜 일하고 싶은 맛이 안 나는 건지, 왜 맨날 내일이 두려운지, 아침에 일어나면 왜 그냥 침대 속에 가만히 누워있고만 싶은지 생각해 보는 것만으로도 나름대로 본인의 상태를 알아보는 첫 단계는 될 수 있겠다.


본인이 매니저시라면 번아웃 했다는 직원들한테 더 이상 휴가정도를 권하지 않기를 바란다. 앞에서 이야기했지만, 번아웃의 치료법은 직원이 인정받는 분위기, 그리고 인정받는 일을 하는 것이다. 요즘 하는 일이 의미가 있는지, 조금 다른 일을 해보고 싶은지, 회사의 입장에서는 어떤 을 지원해 줄 수 있고, 옵션은 무엇이 있는지 이런 이야기를 차근차근해보는 것이 좋겠다. 


피곤함을 느끼시는 분들이 ‘나는 엄청나게 힘든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라고 혹시 본인의 번아웃을 인정하지 않고 계시는 건 아닌지 한번 생각해 보시면 좋겠다 싶어서 쓰게 되었습니다.


Photo by Oscar Keys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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