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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빽지 Jun 07. 2020

과정은 어디에?

광고기획자의 회의감 : ③ 제안

비딩, 입찰, PT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제안 작업은 광고회사가 존재하는 이유다. 광고주가 참여 희망이 있는 광고회사를 직접 고르기도 하며 신청을 받기도 한다. RFP라고 하는 제안 요청서를 받게 되면 평균 2주 정도의 시간을 주는데, 피가 마르는 듯한 압박과 스트레스가 사람을 육체와 심신을 피폐하게 만든다.


제안은 4년 동안 올림픽을 준비하는 운동선수들의 마음가짐과 같다. 그동안 갈고닦은 경험치를 토해내는 순간이다. 회사라는 실루엣에 가려져 누군지 모르는 나와 같은 광고기획자와 익명의 결투를 벌인다.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상대의 먹잇감이 되기 충분하다. 이기면 개인의 명예와 함께 회사는 돈을 벌고 광고주들 사이에서 유명세를 얻는다. 반대로 지면 그 순간 바로 외면. 한 번 떨어진 광고주 제안에는 서로가 오만가지 이유와 불편함 때문에 다시는 들어가지 않는다. 그만큼 광고회사 입장에서는 먹거리가 하나둘씩 줄어드는 것이다. 그래서 제안은 신중하고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제안은 흐름과 합이다

흐름. 하나의 스토리텔링. 그림책이라고 보면 된다. '다음엔 어떤 전개로 흘러갈까?', '이 이야기의 중점은 무엇이고 결말은 어떻게 될까?' 보는 이로 하여금 강력한 흡입력과 흥미를 주어야 한다. 보통 웬만한 책 한 권의 양인 제안서에서 기승전결에 해당하는 흐름은 특히 광고주 앞에서 발표를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더욱 빛나고 몰입할 수 있게 만드는 장치가 된다.


제안은 상대방을 이해시키고 납득시켜야 하기 때문에 말이 많을 수밖에 없다. 가령 주위에 말 많은 친구와 대화를 한다고 가정을 해보자. "요즘 어떻게 지냈어?"라는 질문에 "얼마 전까지 일집일집이었는데, 무기력함을 느껴서 취미로 사회인 야구를 시작했어.  맞다.  00 소식 들었어?  요즘  나가더라~ 얼마 전에 만났는데..."라며 갑자기 새는 말을 하는 친구들이 있을 것이다. 질문한 사람은 당신의 요즘 생활이 궁금했을 것. 야구를 시작했다고 하니 흥미로워 관련 질문을 던지고 싶었을 것이다. 근데 갑자기 대뜸 궁금하지도 않거나 혹은 궁금해도 다음 주제에서 이야기해도 되는 3자의 이야기를 한다. 같은 '요즘 어떻게 지냈어?' 범주에는 들어오지만 궁금해하던 것이 아니다.


합. 회사마다 제안서를 작성하는 방식이 다르고, 그것은 본부 또는 팀 단위로도 색깔이 나뉜다. 어떤 제안이냐 따라서도 힘을 주는 포인트가 다르며, 광고기획자마다 작성하는 스타일도 다르기에 모든 것을 하나로 보이게끔 합을 맞춰가는 것이 중요하다.


프로젝트를 이끌고 가는 PM의 역할이 상당히 중요하다. 의사결정에 있어 모든 것을 수용하기보다는 거르고 벼를 줄 아는 단호함이 있어야 하며, 기획자와 제작자가 각자의 기획 의도와 크리 의도의 선을 넘지 않게 분리를 하고, 정해진 전략이 일관된 흐름과 결과물로 보일 수 있도록 조율하며, 각자에게 작성 파트를 분배하고 취합하여 누락되거나 끊기는 부분을 연결시켜줘야 한다.


제안 시 회의감

나는 결과물보다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스스로 과정이 마음에 안 들면 결과가 좋았어도 그것은 내게 수치로 남는다. 스스로가 과정을 잘 못 이끄는 경우도 있고, 주위 분위기에 맞출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그러려니 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과정이 마음에 들지 않다는 건 그 제안서를 추후 남에게 보여주거나 자랑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과정이 좋지 않으면 그것은 제안서에 온전하게 드러날 수밖에 없다. 흐름이 딱딱 끊기거나, 진짜 말 그대로 흩어져 작성하고 취합만 하여 장표의 디자인과 톤앤매너가 제각각이거나, 중간중간 억지로 말을 연결시키려 넣은 장표가 있거나, 큰 전략을 잡았는데 그것은 그냥 허물일 뿐이거나, 사람들에게 노출되는 실체인 콘텐츠가 전략에 담기지 않고 전부 날이 서있거나. 흐름과 합을 무시한 결과다.


제안서를 위에서부터 잡고 밑으로 정방향으로 작성을 해도 잘 쓰는 사람은 흔치 않다. 그렇다면 각자 흩어져 일단 쓰고 보자이거나, 아래서부터 위로 올라오는 제안서를 과연 누가 잘 쓸 수 있을까? 뼈대를 만들고 살을 붙인 후 옷을 입혀야 하는데, 옷을 먼저 골라둔 후 옷에 맞는 살덩이를 덕지덕지 붙이고 머리통을 뚫어서 뼈대를 집어넣는 것이다.


PM이었던 순간이 많아서 그럴까? 새로운 방식에 적응이 안돼서 그럴까? 일부 파트만 작성한다는 것이 실은 자존심 상해서 그럴까? 모든 상황을 다 공유받지 못했기 때문일까? 실은 위에 말한 모든 것들이 담겨 있는데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걸까? 흐름과 합에 대한 부분에 대해 스스로 OK를 하지 않으면 왜 자꾸 이런 물음표만 생길까.


그럴 수 있어

어떻게는 제안 작업은 마무리가 되고 광고주에게 제출이 된다. 그것이 똥인데 된장으로 보든, 된장인데 똥으로 보든 그건 광고주가 선택한 것이니 왈가왈부하지 않는다. 때론 나의 생각이 멀리 갔기에 구성원 또는 회사의 생각이 맞을 수도 있고, 나아가 광고주의 선택이 일리 있는 현실일 수 있다. 그래서 논리 정연한 제안으로 수주를 하든, 가령 팔리는 제안서라 불리는 제안으로 수주를 하든 결과는 결과로써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방식과 과정도 이해한다. 여러 회사를 거치며 그 회사만의 방식에 나를 맞췄었고, '아하. 이런 방식으로도 과정을 거치고 제안서를 제출할 수 있구나'한다. 거기서 얻어가는 새로운 경험치와 시야만 있다면.


광고기획자에겐 고집도 필요하지만 유연함도 필요하다. 늘 항상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는데, 어느 순간 유연함을 버리고 고집만 수용하려고 한 것 같다. 지금 내게는 유연한 사고가 필요하다. 서로 같이 일하고 과정에서 결과라는 탑을 쌓으니까.


그럴 수 있어.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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