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뜩 겁 먹어야만 비로소 결심할 수 있는, 퇴사의 길.
한때의 우리나라에는 소위 '평생직장'이 당연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마치 가족처럼, 아니 가족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회사에서 보내며 한 직장에서 수십 년 동안 일을 하는 것이 당연하고, 직장생활이 곧 인생과 동일한 의미를 지니던 때 말입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아니 최근에서야 우리나라에도 이직이나 퇴직이 흔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더 나은 처우를 찾아 이직을 하는 경우는 물론, 정신적/육체적으로 고된 회사생활에서 벗어나 쉬기 위해, 혹은 더 공부하여 학위를 취득하거나 전문직종으로 가기 위해, 혹은 완전히 맨땅에서 새로운 도전을 위해 사원증을 내려놓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한 언론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직장인 중 퇴직하는 비율은 전체의 17% 수준이라 합니다. 어림 잡아 5명 중 1명이 회사를 나가는 꼴입니다. 또 다른 언론의 소셜 미디어 빅데이터 조사에 따르면 2015년에서 2018년까지 불과 3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소셜 미디어에서 '퇴사'를 언급하는 양은 매년 2배씩 늘어나고 있고, 2015년에는 '힘들다' '압박' '막히다'와 같은 부정적 언급이 60%가 넘었다면 2018년 현재는 '축하' '꿈꾸다' '응원하다'와 같은 긍정적 언급이 60%를 넘는 등 퇴사의 문화도 달라졌다고 하네요.
퇴사를 결행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텍스트로 음성으로 영상으로 퍼져 나가고, 퇴사를 준비하는 학교와 각종 강연/클래스가 열리고, '취준생'에 이어 퇴직을 준비하는 '퇴준생이라는 신조어가 생기고, 서가에서는 퇴사와 연관된 책들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 제가 쓰고 있는 이 글조차도 퇴사에 관련된 글이죠!
바야흐로 <대퇴사시대>인 것입니다.
이직이든 학업이든 창업이든 혹은 휴식을 위해서든, 어떤 이유에서라도 퇴사하는 이들에게 회사를 다니는 직장인들은 용기 있는 결정이라고 추켜세우곤 합니다.
제가 게스트하우스 창업과 운영을 위해 퇴사를 알리던 2017년 3월에도 제 결정에 큰 용기라며 응원하는 지인들이 많았고 일부 사람들은(진심인지는 모르겠지만) 부럽다고 하기도 했지요.
하지만 퇴사 이전에 거의 6개월 넘게 고민했고, 퇴사한 후 이제 1년 8개월 정도 살아온 지금 돌아보는 제 입장에서 볼 때 퇴사는 오히려 겁쟁이가 되어야만 비로소 결심할 수 있습니다. 물론 퇴사를 결심하는 결정적인 순간에는 큰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퇴사를 결정하기까지의 모든 고민과 계산은 겁쟁이의 시각에서 해야만 내 삶을 이어나갈 수 있고-속된 말로 먹고 살 수 있고, 그래야만 내 결심을 온전히 책임지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퇴사를 결정하는 순간에 대하여 겁쟁이의 3단계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가장 중요한 물음이자, 이 물음에 대한 답이 있어야 비로소 퇴사를 결심할 수 있습니다.
다만 꼭 거창하고 원대한 계획만이 답이 아니라, 어떤 것이라도 이 물음에 답이 될 수 있습니다. 이직, 공부, 창업, 여행, 휴식, 그 어떤 것이라도 말이죠.
이 답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긴 시간을 두고 자기 자신에 대한 고민과 성찰을 해보는 것입니다. 나는 나 자신과 하루 24시간을 함께 하는 존재이기에 자신을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의외로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것을 할 때 가장 즐거운지, 나는 어떤 사람인지 뚜렷하게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기에 MBTI 테스트나 에고그램, 8가지 성격 유형과 같은 갖가지 성격 테스트가 존재하고, 많은 사람들이 테스트를 하며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겠죠.
하지만 성격 검사에서는 주로 나는 외향적인지/내향적인지, 리더인지/팔로워인지, 이성적인지/감성적인지, 직관적인지/분석적인지 등의 유형은 검사할 수 있지만 내가 어떨 때 행복하고 무엇을 좋아하는지는 자세히 알려주지 않습니다. 몇 가지 유형으로 표면적인 나를 정의하는 성격 테스트보다는, 70억 명 중 유일한 자신에 대한 깊은 고민과 성찰로서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나름의 답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이를 통해서 퇴사 후 계획하고 있는 일이 나와 잘 맞을지도 확인할 수 있겠죠.
예컨대, 제 얘기를 해볼까요. 저는 일방적으로 지시 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제 생각과 가치관을 현실화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비록 당장의 보상이 없더라도, 내가 즐겁게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일부의 손해를 감수하죠. 정적인 일보다는 아이디어와 변화를 적용할 수 있는 일을 좋아합니다. 혼자서 시간 보내는 것을 좋아하고, 나 자신의 공간에서는 게으르지만 타인과 관계를 맺는 공간이나 보여지는 영업 공간에서는 긴장하고 일을 찾아서 합니다. 그렇기에 지금 하고 있는 사업이라는 일이 꽤나 잘 맞는 것 같습니다.
'무엇을 할 것인가'가 퇴사 결심의 시작이라면 '먹고 살 수 있을까'는 퇴사를 실행하는 결정적인 요소가 됩니다.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기에 먹고 사는 문제는 곧 내가 하려는 일이 적당한 금전적 가치를 창출하는가의 문제가 되겠지요. 이 물음에 명확한 답을 내리지 못한다면, 정신적/육체적으로 괴로운 회사를 '먹고 살기 위해' 다니다가 나왔더니, 이제는 그 '먹고 사는' 문제가 나를 압박하게 될 것입니다.
이직하는 경우에는 크게 해당사항이 없을 수 있겠지만, 공부를 시작한다거나 창업을 한다거나 프리랜서로 전향하는 등의 결정에서는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보통의 사람들은 1개월 단위로 수입과 지출이 순환되므로 아래와 같이 월 단위의 수입/지출 sheet의 간단한 예시를 만들어 봤습니다.
우선 퇴사 후 내가 하려는 일에서 최소한 얼마나 수입이 보장되는지를 파악합니다. 저의 경우, 영업 중인 가게에서 인건비 명목으로 받는 돈이 있고, 매월 남는 이익을 함께 투자한 공동 투자자들과 배분하고 있습니다. 이 중 후자-월별 영업이익은 그 달의 성과에 따라 등락이 있겠으나, 어느 정도 평균치를 대입합니다.
그 다음은 매월 지출하는 비용을 산정합니다. 고정적으로 일정한 금액을 지출하는 월세, 보험료, 대출금 상환 등이 있고 변동 폭이 있는 식비, 기타 소비 등이 있습니다. 지출 내역을 산정할 때 중요한 점은 '이 지출이 꼭 필요한가'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저의 경우에는 경기도권에 있는 본가에서 독립해 자취하고 있는데, 기본적으로 지출하는 월세와 관리비가 만만치 않습니다. 이것만 절약해도 크게 지출을 절감할 수 있죠. 하지만 자취를 포기하는 경우에는 가게의 원활한 운영이나 운신이 크게 어려워집니다. 보험료나 소비생활 지출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즉, 이 비용을 지출함으로써 내가 얻는 이득이나 혜택이 적당한가를 결정해야 합니다. 누군가는 돈을 절약하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하고, 누군가는 지출함으로써 얻는 효익이 더 중요하다 생각할 수 있으니, 이 결정은 자신 만이 할 수 있겠죠.
이 때 수입이든 지출이든 숫자를 산정할 때에는 절대 낙관적이지 말아야 합니다. 가장 겁쟁이가 되어야 하는 순간입니다. 특히 새롭게 도전하려는 일에서 테스트 기간을 거치지 않은 경우, '잘 풀리면 이 정도 수입은 되겠지? 절약을 잘 하면 지출은 이 정도면 되겠지?'하며 낙관하기보다는 최대한 보수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퇴사 후 하기로 결정한 것 그 다음의 next step을 결정하는 단계입니다. 쉽게 말해 '이거 하다가 대박나면 뭐하지?' 혹은 '이거 하다가 망하면 뭐하지?'라는 생각이죠. 물론 1번이나 2번 질문에 비해서는 덜 구체적이고 모호할 수도 있겠지만 미리 생각을 해놓는다는 그 자체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성공 혹은 실패의 순간은 정의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어떤 이직이 성공/실패한 것일까요? 사업은 어떤 상태가 되었을 때 성공/실패한 것일까요? 공부는 얼만큼 해야만 성공과 실패를 가늠할 수 있을까요?
이렇게 성공과 실패를 정의할 때에는 나름의 시간 기한과 그 때까지 자신 만의 목표를 설정해놓으면 도움이 됩니다. 퇴사 후 X년 동안 계획했던 일을 하면서, 그 기한까지 XX 정도의 성과 혹은 목표를 달성해보자, 라고 말이죠.
결심한 일을 하다가 잘 풀리는 경우에는, 잘 풀린 그 일을 계속하면서 크게 확장하거나 새로운 도전을 하도록 스스로 결정할 수 있기에 성공한 경우는 길게 말하지 않겠습니다. 잘 해오던 일을 너무 낙관적이거나 너무 무모하지 않게 잘 이끌어나가면 되겠죠. 무엇보다 제가 아직 큰 성공을 맛보지 못해서 남길 말이 없네요. ㅠㅠ.
반면 정의한 기한 내에 목표한 것을 달성하는 데에 실패했을 때는, 그 실패 이후 무엇이 남을지 한 번 더 계산기를 두드려볼 때가 찾아옵니다.
만일 이직을 했다면 얼마 간의 경력이 남겠고, 빚을 내서 도전했다면 부채가 남겠고, 퇴사 당시 가지고 있던 자산에서 비용을 지출했다면 그 이후 남는 잔여 자산이 남겠고, 가게를 냈다면 부동산 처분 가치(보증금/권리금 등)가 남겠죠. 그리고 그 일을 하느라 얼마 간의 시간을 보내서 나이를 먹고, 크고 작은 실패를 겪은 나 자신이 남을 겁니다.
이렇게 남는 것을 가지고 무엇을 해야 할까요? 다시 구직자 신분으로 돌아가 다른 직장을 찾아볼까? 경험을 기반으로 다른 도전을 준비할까? 다른 공부를 시작할까? 다시 1번의 질문으로 돌아간 기분이지만, 실패를 가정한 질문이기에 아까보다는 조금 더 가혹하고 처절하게 답을 내려야 할지도 모릅니다.
여러 매체에서 퇴사를 논하고, 퇴사에 대한 긍정적 인식이 확산되어 가는 소위 <대퇴사시대>. 이 시대에서 퇴사를 준비하는 사람은 과감한 모험자보다는 걱정하고 고민하는 겁쟁이의 마음을 가져야 결심을 온전히 책임지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