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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백구 Oct 05. 2019

삶의 주춧돌 붕괴가 만든 <조커>

토드 필립스 감독, 2019년 영화 <조커> 해설집-2

[1편에 이어 계속]

모든 사람에겐 삶의 주춧돌이 있다. 자신이 믿고 의지하는 일종의 신념이다. 흔히 종교가 있을 수 있고, 이루고자 하는 목표나 꿈이 될 수 있다. 가족이나 연인일 수도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삶을 지탱해주고 삶의 원동력이 된다. 그런데 만약 그 주춧돌이 붕괴된다면 어떻게 될까. 삶의 기준이 된 종교가 사이비범죄집단이었다면, 축구선수를 꿈꾸던 사람이 다리 한 쪽을 잃는다면, 내가 존경하는 인물이 나를 비난하고 조롱한다면, 사랑하는 사람이 평생 나를 속여왔다면, 가족을 위해 삶을 바친 가장이 가족을 잃는다면. 이러한 주춧돌의 붕괴는 인간을 어디로 끌고갈까.
토드 필립스 감독의 영화 <조커>는 한 인간의 주춧돌이 하나씩 붕괴되는 과정을 그린다. 결국 모든 주춧돌이 붕괴됐을때 인간은 어디에 도달하는지 상당히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이 설득력은 상당해서 실제 사회문제로까지 번질 것을 우려하는 평론가들도 있다. 이번 리뷰에서는 <조커>가 빚지고 있는 과거 영화들부터 영화의 구조, 그리고 최근 벌어지고 있는 논란까지 다룬다. 쓰다보니 내용이 길어서 부득이하게 세 편으로 나눴다.


※스포일러 주의


아서 플렉(호아킨 피닉스)은 매장이나 아동병원 등에서 광대로 일하며 스탠드업 코미디로 성공하길 꿈꾸는 사람이다. 오래된 아파트에서 거동이 불편한 노모인 페니(프란시스 콘로이)를 모시고 살고 있다. 그는 매일 밤 어머니와 고담시 최고 토크쇼 진행자인 머레이 프랭클린(로버트 드 니로)의 ‘머레이 쇼’를 보는 것이 가장 큰 낙이다.

아서는 웃음을 주는 직업을 가졌지만 시도 때도 없이 터지는 발작적인 웃음 때문에 불편함을 안기기 일수다. 결국 이 부적절한 웃음으로 발생된 상황으로 인해 아서는 살인을 저지르게 한다.
/사진=영화 <조커> 스틸컷
너는 세상을 웃게 하기 위해 태어났단다.


본격적으로 영화를 들여다보자. 우선 <조커>는 전반부와 후반부를 나눠서 보면 이해하기 좋다. 이야기의 전반부와 후반부가 다른 양상으로 흘러가기 때문이다. 전반부에서는 모순적인 상황을 지속적으로 펼쳐진다. 페니는 세상을 웃게 하기 위해 태어났다며 아들인 아서를 '해피'라고 부르지만 그의 삶은 행복과 거리가 멀다. 오래된 아파트에서 노쇠한 어머니를 모시고 있으며, 직장에서는 쫓겨난다.


사회복지사와의 상담하는 장면이 몇차례 등장한다. 이들은 꽤 오랜 기간 얼굴을 봐온 것처럼 보이지만, 대화 내용을 보면 각자 서로의 할 말만 하고 있다. 소통이 아닌 각자가 원하는 것만을 내뱉고 서로에게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다. 아서는 머레이쇼를 보며 유명 코미디언이 되는 꿈을 꾸지만, 타고난 재능이 없고 웃음 참지 못하는 결함까지 있다.


모순적 상황과 함께 아서의 정신분열과 망상이 뒤섞인 시각이 그대로 드러난다. 다른 코미디언이 하는 스탠드업 코미디를 보는 장면에서 아서는 청중들과 다른 타이밍에 웃는다. 그러면서 코미디언이 아닌 주변을 살핀다. 노트에는 '주변 반응을 확인할 것'이라고 메모한다.


이는 그가 코미디에 재능이 없을 뿐더러 공감능력까지 현저히 떨어진다는 점이 드러낸다. 아서는 옆집 여자의 아주 작은 호의를 착각해 그녀를 미행하기도 하는데, 이후 두 사람의 관계는 묘하게 발전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아서는 그녀와 만난 적이 없고 모두 망상이었다는 사실이 후반부에 밝혀진다.


이처럼 전반부는 아서가 처한 상황과 그의 정신분열적 시각을 전달해 이야기가 뒤죽박죽 섞인 것처럼 보인다. 스탠딩 코미디 무대에 올라 공연을 하는 중에 갑작스럽게 음악이 흐르고 아서의 조크가 들리지 않는 순간이 있다. 마치 공연이 성공적으로 진행된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는데, 이 역시 아서의 시점이다. 이후 이 공연은 조롱거리가 된다. 즉, 전반부는 아서의 정신 속에서 주관적으로 재구성된 이야기다.

후반부에서는 그 재구성된 이야기가 하나씩 무너진다. 아서의 유일한 낙이었던 머레이쇼에서 머레이가 아서의 코미디를 조롱한다. 옆집 여자는 집에 찾아온 아서를 보고 기겁한다. 옆집 여자와 관계는 아서만의 망상이었다. 아서는 아버지에 대한 갈증이 있다. 머레이쇼에 출연하여 머레이에게 격려를 받는 장면은 아서에게 머레이는 아버지와 같은 존재이고, 그가 자신을 품어주길 바라고 있음을 보여준다.


아버지가 토마스 웨인이라는 페니의 말에 무모하게 찾아간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아버지라고 믿은 사람으로부터 돈을 노리는 파렴치한으로 몰린다. 게다가 조사해보니 본인은 입양되었고 유일한 가족인 페니는 친어머니가 아니고 어린시절 자신을 학대했다는 기록까지 나온다.


나의 죽음이 삶보다 더 가치있기를


아서가 결함투성이인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의 삶을 지탱하던 주춧돌이 있었다. 하지만 이같은 주춧돌의 붕괴는 결국 자기파괴를 일으키고 만다. 아서는 지하철 살인사건으로 모두가 자신에게 관심을 가진다고 착각하고 기뻐했다. 마지막 주춧돌이다. 이는 머레이쇼 촬영현장에서 붕괴된다. 아서는 '똑똑'이라고 말하며 권총을 자신의 턱밑에 두고 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청중들의 비난, 머레이의 일갈를 듣고 그 주춧돌이 무너졌음을 깨닫고 자신의 노트에 적힌 '나의 죽음이 삶보다 더 가치있기를'이라는 글귀 본 뒤 총구의 방향을 바꾼다.


<조커>에서 큰 변곡점은 두 가지다. 아서가 우발적 살인을 한 장면과 자신이 입양되었고 아동학대를 당하며 자랐음을 알게 된 장면이다. 이야기의 큰 흐름을 바꾸는 지점들이다. 전자는 빈부격차가 극심한 고담시 시민들의 분노를 표출시키는 상황의 변곡점이다. 후자는 아서가 그 분노를 받아들이는 감정과 의지의 변곡점으로, 영화 전반부가 아서의 망상적 재구성 이야기였던 것처럼 인생 자체가 망상으로 인해 스스로 재구성해왔음을 깨닫는 장면이기도 하다.

변곡점을 지나며 아서의 변화는 춤을 통해 묘사된다. 그는 처음 총을 받았을 때 집에서 웃통을 벗은 채 춤을 춘다. 이어 지하철에서 3명의 남자를 죽인 직후에도 음악에 몸을 맡긴다. 세 번째는 욕실에서 춘다. 춤은 머레이쇼를 위해 집을 나서며 계단에서 춤을 추며 절정에 이른다. 어설프던 춤은 계단을 내려오며 비로소 완성된다.


그 계단은 언제나 일이 끝나면 힘겹게 오르던 곳이다. 아서에게 코미디언이 되는 일은 가파른 계단을 오르는 것처럼 힘겨웠지만, 조커가 되는 것은 흥겹고 편안하게  내려갈 수 있을 만큼 운명 같은 일이다. 결국 조커가 되는 것을 온전히 수용했음을 드러내는 장면이다.


아서는 주춧돌이 모두 무너지고 나서야 조커를 수용했다. 고담시의 극심한 빈부격차와 분노는 조커라는 상징으로 표출되기 시작한다. 아서의 첫 번째 살인은 관심 받지 못한 개인이 멸시와 소외, 조롱으로 인해 일탈한 것인데, 이를 빈부격차에 대한 사회적 분노로 연결하며 개인의 일탈이 아닌 부자를 향한 상징적 저항행위로 변모한다. 본인 스스로 조커가 된 것이 아니라 사회가 그를 조커로 만든 것이다. 아서의 가정사, 정신질환, 살인은 개인의 문제였으나 영화는 두 변곡점을 지나며 개인의 문제는 사회문제로 인해 벌어질 수 밖에 없었다고 합리화한다.


이 영화가 상반된 평을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3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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