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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슬 Mar 22. 2018

06. 열꽃

방콕

어떤 감정인지 해석할 수 없었다. 출국 4시간을 남겨둔 시각. 택시기사에게 '돈므앙 공항'을 외치지 않고 대신 '소이 람부뜨리'를 주문했다. 십오 분 정도 지나 람부뜨리 골목길에 도착했다. 사지도 않을 팔찌 가게를 몇 군데 건성으로 구경하다 발길을 틀어 홍익 게스트하우스로 가 매니저 누나에게 인사했다. 

"저 오늘 인도 가요" 
"이제 가는구나, 몇 시 비행기?"
"비행기 3시간 반 뒤에 떠나요"

설렘이나 긴장이 아닌 그저 갈 때가 되었다는 무거운 선언이었다. 뭔가 이상하다. 미묘하게 스트레스가 쌓인다. 가기 싫은 곳을 가는 것도 아닌데. 그렇다고 지난 4일의 태국을 무척 즐겼던 것도 아닌데.


그토록 다시 가고 싶던 인도였는데. 


매니저 누나와 몇 마디를 더 나누다 건강하라는 덕담을 듣고 게스트하우스를 나왔다. 도살장에 끌려가기 싫은 소처럼 길을 비틀비틀 걷다 이번에는 한 카페에 앉아 맥주를 주문했다. 시원하다. 몇 모금 마시지도 않았는데 어제 잠을 제대로 못 자 피곤한 탓인지 금방 취기가 돌았다. 이십 분 즈음 지났을까, 한 병을 비우고 벌게진 얼굴로 길을 다시 걷기 시작했다. 술기운인지 조금 용기가 생겨 다시 택시를 잡아 타고 이번에는 행선지를 제대로 불었다. 돈므앙. 택시 기사는 묻지도 않고 톨비를 내며 고가도로를 신나게 달리기 시작했다. 어쩌다 이렇게 찌질한 여행의 시작을 가지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마치 공짜 티켓 생겼는데 시간이 남아 참석한 콘서트 느낌이랄까. 익숙한 오프닝 공연이 끝나고 아무 생각 없이 본 공연을 기다리는 기분이다. 

어쩌면 지난 인도 여행 중 가진 어두운
 감정이 마음속에 침전되어 있다가 여행을 다시 떠나는 시점에서 그게 흔들려 다시 부유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몇 년 전 두 달의 인도는 많은 경험과 영감을 주었지만 한편 지치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어제 태국 친구가 '왜 방콕에 와서 아무것도 안 하고 있냐'라고 물었을 때 '인도 가면 "빡세게" 여행해야 하니까 많이 쉬어줘야 돼'라고 대답했다. 오래 생각하고 말한 대답은 아니지만 이미 머릿속에서 인도 여행 중 가졌던 경험 중에 어떤 것들이 나도 모르게 부담감 같은 것을 만들고 있던 건 아닐까. 여행이 항상 좋은 것만 먹고 마시고 즐기는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이런 기분으로 여행을 시작하는 게 맞는 건지는 또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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