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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을 나는 백구 Feb 20. 2023

예쁜 글씨

신언서판(身言書判)을 생각하며

  처음 교사 생활을 시작했을 때, 학생들의 생활 기록부를 손글씨로 작성했다. 어려서부터 악필이었던 나는 평생의 기록을 손으로 써야 한다는 중압감에 시달리다 펜글씨 책을 사서 무던히도 연습했다. 지금의 아내에게 보냈던 연애편지를 장인어른이 보시고는 내용에 한 번 놀라시고 글씨체에 한 번 더 놀라셨다고 하니, 어지간한 사람은 잘 알아보기도 어려운 필체로 어찌 어린 학생의 생활기록부를 쓸 수 있겠는가. 


  펜글씨 연습을 하다보니 종이에 쓰는 글씨는 그럭저럭 쓸만했지만 칠판에 판서하기란 또다른 어려움이 있었다. 아이들 귀가한 뒤 꾸준히 연습을 했지만 잘 되지는 않았다. 그러던 중  EBS  강의를 하게 되었고,  TV를 통해 내 글씨를 온천하에 공개해야만 하는 지경에 이르니 자연 글씨가 반듯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활용하는 글씨 쓰는 법은 이러하다. 일단 원고지와 같은 빈칸에 글씨를 써 본다. 이왕 글씨를 쓸 때는 원고지 칸이 꽉차게 쓰는 것이 좋다. 그리고 흔히 말하는 ‘고딕체’로 써야 한다. 글자의 전체 틀을 네모 반듯하게 만들려고 해 보는 것이다. 이게 어느 정도 완성되면 그 뒤에 다양한 글씨체를 연습할 수 있다.


  구술 면접을 할 때, 면접자의 외모와 태도와 목소리가 주는 첫인상이 평가에 큰 영향을 준다고 한다. 논술이라면 당연히 글씨를 보고 첫인상을 떠올리게 된다. 아무리 잘 난 사람이라도 글씨를 엉망으로 써서 읽는 이를 피곤하게 만들 정도라면 생김새에 대해 오해할 수도 있겠다.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는 말이 있다. 옛날에 인물을 선택하는 데 표준으로 삼던 조건을 말한다. 몸가짐, 말씨, 필력, 판단력의 네 가지를 이른다. 나는 이 ‘필력’이 글을 쓰는 능력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필체’까지도 포함하는 말이라 생각한다. 전자 장비를 많이 사용하는 세대라 글씨체가 엉망인 게 당연한 시대에 오히려 조금만 예쁜 글씨를 쓰면 채점자에게 긍정적 신호를 줄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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