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아, 딸아, 내일의 너희에게 보내는 스물여덟 번째 편지
사랑하는 아들과 딸에게.
사람들은 흔히 사랑이 설렘으로 시작해서 뜨거운 열정으로 타오른다고 생각하지. 하지만 아빠가 긴 세월을 살아보며 깨달은 진짜 사랑의 시작점은 생각보다 훨씬 다양하더구나.
오늘은 너희 엄마를 보며 아빠가 뒤늦게 알게 된, '연민(憐憫)으로 완성되는 사랑'에 대해 이야기해 주려 한다.
1. 짜증과 실망을 넘어 찾아온 감정
아빠도 처음에는 너희 엄마를 뜨겁게 사랑해서 결혼했단다.
하지만 함께 살다 보니 마냥 좋기만 한 건 아니었어.
살기 바빠서, 혹은 성격이 안 맞아서 짜증을 내기도 했고,
때로는 서로에게 실망해서 마음의 문을 닫기도 했지.
그저 무덤덤한 일상이라고 생각하며 지내온 날들도 많았어.
그런데 어느 날 문득, 밥상을 차리거나 가만히 앉아 있는 엄마의 뒷모습을 보는데
가슴 한구석이 쿵 하고 내려앉더구나.
'아, 저 사람은 단 한 번도 자신을 위해 살아본 적이 없구나.'
2. 맏딸, 며느리, 그리고 엄마라는 이름의 무게
가만히 돌아보니 너희 엄마의 삶은 온통 '희생'이었어.
자기 친정에서는 맏딸로서 동생들을 챙기느라 바빴지.
마음만 쓴 게 아니라 물심양면으로 동생들을 뒷바라지하느라 본인의 꿈은 늘 뒷전이었어.
결혼해서는 어땠니.
넉넉지 않은 아빠 집안 챙기느라 고생하고,
너희들 키우느라 본인의 젊음을 다 바쳤지.
엄마는 그게 당연한 일상인 것처럼 묵묵히 해냈지만,
그 당연함 속에 얼마나 많은 눈물과 참음이 있었을지 아빠는 너무 늦게 알았단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니 엄마에 대한 깊은 감사와 존경이 생겨나더구나. 그리고 뒤이어 찾아온 감정은 사무치는 '안쓰러움'이었어.
나이 들어 작아진 어깨가 너무 불쌍해 보이고,
거칠어진 손이 너무 안쓰러워 보였지.
젊은 날의 예뻤던 아내가 아니라,
고단한 삶을 버텨온 한 인간으로서 엄마가 너무나 가엾게 느껴졌단다.
3. 연민은 사랑의 가장 깊은 단계다
누군가는 상대를 불쌍하게 여기는 게 무슨 사랑이냐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아빠는 생각이 다르다.
상대가 불쌍해 보이는 순간,
비로소 진짜 사랑이 시작되는 거야.
그 사람의 아픔이 내 아픔처럼 느껴지고,
그 사람의 고생을 이제는 내가 보듬어주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
아빠는 이제 그 연민의 마음을 담아 엄마를 더 깊이 사랑하려 한다.
남은 생은 엄마가 자신을 위해 살 수 있도록,
그리고 그 고단했던 세월을 위로받을 수 있도록 아껴줄 생각이란다.
4. 사랑의 시작은 여러 가지 얼굴을 하고 있다
사랑하는 아들과 딸아.
너희도 주변을 한번 둘러보렴.
사랑은 꼭 영화처럼 낭만적으로만 시작되는 게 아니란다.
어떤 사랑은 '연민'에서 시작되기도 하고,
어떤 사랑은 지독한 '미움'이나 '실망' 끝에 이해로 피어나기도 하며,
어떤 사랑은 깊은 '고마움'에서 싹트기도 한단다.
중요한 건 그 감정의 끝에서 상대를 얼마나 귀하게 여기느냐는 것이지.
너희 곁에 있는 사람을 가만히 들여다보렴.
혹시 그 사람의 뒷모습이 짠하게 느껴진다면,
너희는 이미 그 사람을 아주 깊이 사랑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단다.
아빠는 이제 엄마에게 쑥스러움을 무릅쓰고 더 자주 말해주려 한다.
"고생했다, 고맙다, 그리고 짠한 내 사람아, 사랑한다."
너희도 가슴 속에서 우러나오는 진짜 사랑을 만나길 바라며.
아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