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서 마주한 나의 민낯
아들아, 딸아, 내일의 너희에게 보내는 마흔아홉 번째 편지
사랑하는 아들과 딸에게.
오늘은 엄마가 수술 후 처음으로 외래 진료를 보고 온 날이란다. 다행히 수술 부위는 잘 아물고 있다고 해. 하지만 종양의 모양과 위치가 워낙 안 좋았던 터라 지속적인 관찰이 필요하고,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방사선과 항암 치료를 병행하자는 의사 선생님의 소견이 있었어. 가장 큰 고비는 넘겼지만, 앞으로 우리 가족이 버티고 이겨내야 할 산들이 아직 남아있는 셈이지.
그런데 오늘은 엄마의 병세에 대한 이야기보다, 오늘 병원에서 아빠가 한 행동들에 대해 고백하고 스스로를 반성하는 이야기를 하려 한다.
오늘 하루 종일 병원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내가 했던 행동들을 차분히 되돌아보니, 참 낯 뜨겁고 부끄러운 순간들이 많았단다. 한마디로, 움직이고 묻기 전에 '생각'을 먼저 하지 않았어.
가령 이런 식이었지. 의사 선생님이 진단서 발급을 위해 '초안'을 주셨어. 원무과에 가져가서 비용을 지불해야 진짜 원본 진단서를 발급해 주는 시스템인데, 아빠는 그 초안을 덜컥 원본인 줄 알고 그냥 가져가려다 제지를 당했지. 그뿐만이 아니야. 조직검사 결과지와 방사선 판독지 같은 서류를 발급받으려면 '제증명 발급 창구' 옆에 있는 방사선 cd 관련 창구로 가야 하는데, 그걸 확인하지도 않고 일반 원무과 창구에 가서 막무가내로 서류를 내놓으라고 따지듯 물어보기도 했단다.
순간, 아빠는 내 모습에 정신이 번쩍 들었어. TV 드라마를 보면 병원이나 관공서에서 절차도 모르면서 막무가내로 큰소리부터 치는 고집불통 아저씨들이 나오잖아. 내가 속으로 '나는 저렇게 늙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했던 그 가증스럽고 답답한 모습을, 오늘 아빠가 고스란히 답습하고 있었던 거야.
물론 핑곗거리는 있지. 엄마의 병원에만 오면 극도로 긴장하게 되고, 엄마가 조금이라도 덜 기다리게 하려고 마음이 앞섰기 때문이었어. 아픈 아내를 지켜야 한다는 조급함이 이성을 마비시켰다고 스스로를 위안해 보지만, 결국 그것은 변명일 뿐, 그렇게 행동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어. 사랑과 걱정이 무례함과 경솔함의 면죄부가 될 수는 없으니까.
그 부끄러운 깨달음 끝에 아빠는 한 가지 굳은 결심을 했단다. "말하기 전에, 행동하기 전에 속으로 딱 10초만 세어보자."
1초, 2초, 3초... 그 10초의 시간은 조급한 감정을 가라앉히고, 이성적인 판단을 불러오는 마법의 시간이란다. 10초만 주위를 둘러보고 안내문을 읽었다면 창구를 헷갈리지 않았을 것이고, 10초만 상대의 입장을 생각했다면 부드럽게 질문할 수 있었겠지.
이 '10초의 멈춤'은 비단 병원에서만이 아니라, 아빠가 새로 출근하게 될 학교에서도 반드시 지켜야 할 철칙이라고 다짐했어. 낯선 환경, 낯선 아이들 앞에서 내 경험만 믿고 섣불리 말하고 행동하기 전에, 10초의 여유를 두고 상황을 살피는 지혜로운 선생님이 되어야겠다고 말이야.
사랑하는 아들과 딸아.
나이가 든다고 저절로 지혜로워지는 것은 아니란다. 끊임없이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고, 부끄러움을 느낄 줄 알며, 고치려고 노력해야만 진짜 어른이 되어갈 수 있어. 오늘 아빠는 병원에서 큰 부끄러움을 겪으며 또 한 뼘 어른이 되었단다.
너희도 살다 보면 마음이 너무 간절하거나 다급해서 이성을 잃고 실수할 때가 있을 거야. 그때마다 아빠의 오늘을 떠올리며 마음속으로 '10초'를 세어보렴. 그 짧은 침묵이 너희의 품격을 지켜줄 것이다.
앞으로 남은 엄마의 치료 과정도, 아빠의 새로운 학교생활도, 조급해하지 않고 10초의 여유를 가지며 묵묵히 걸어가련다. 우리 가족 모두, 다시 한번 힘을 내보자꾸나.
너희 앞에서 늘 배우고 성장하고 싶은 아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