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하려면 무언가에 미쳐 있어야 하는 모양이다. 열정을 가지고 집착하는 대상 말이다. 수집하고 연구하고 그 하나에 대해서만큼은 잘 안다고 자부할 수 있을 만한 것. 나의 주변에는 많은 수집가와 ‘덕후’들이 있지만, 어째서인지 나만큼은 그 정도의 열정이 없는 것 같다. 어떤 것과도 사랑에 빠지지 않아도 그럭저럭 살 수 있을 것이다. 힘이 들 때 붙잡을 것이 없기는 하겠지만.
지금껏 어떤 목표를 위해 나를 진정 불태운 적이 있냐고 한다면, 없다고 대답하겠다. 많은 이들이 그런 경험을 고등학생 시절에 하는 것 같다. 그다음이라면 취업 준비 기간이겠지. 대입을 위해 지긋지긋한 시간을 보낼 때의 나는 그저 지쳐만 있었다. 지금 상태에서 그때로 돌아간다면 지금과 같은 대학에 올 자신은 없다. 하지만 그때의 내가 모든 것을 바쳐 열심히 했냐고 묻는다면 확답을 할 수도 없다. 내가 나를 끊임없이 의심하기 때문인지, 정말로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것인지도 알 수 없다. 나름대로 열심히 했지만, 열정을 가지고 진심으로 입시에 임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다른 친구들에게 비하면 나는 그렇게 적극적으로 열심히 한 학생은 아니었던 것 같다. 친구들을 따라서 교내 대회에 참가했고 담임 선생님을 찾아가 학생기록부 내용을 상담하지도 않았다. 마음 한구석에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식의 생각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 같다. 될 일은 되고 안 될 일은 안된다고 믿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진심으로 최선을 다해도 실패한다면 회복할 수 없을 것 같아 스스로 핸디캡을 준 꼴이라고 해야겠다. 비겁한 시간을 보냈다.
나는 줄곧 그렇게 비겁해 왔다. 아무도 나에게 큰 기대를 하지 않았으면 했기 때문이었다. 세상에는 많은 두려운 일들이 있지만 나는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상황'이 가장 두렵다. 열정적으로 뭔가를 했는데 어떤 결과도 보여주지 못한다면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 그것이 나를 열정적이지 않은 인간으로 만들었다. 친구들은 나에게 넌 뭘 해도 잘할 것 같아,라고 말한다. 그런 기대가 어디에서 오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눈에 띄게 뭘 하는 건 아닌데 여하튼 어디론가 가고는 있다는 말처럼 들린다. 나쁜 말은 아니다. 나의 특징 없음이 타인에게 어떻게 보이는지를 잘 표현하는 말일지도 모른다. 뭘 하는지 모르는데 뭘 하고는 있고, 뭘 하겠다는 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뭔가를 해내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은지는 모르겠으나 그런 사람이 되어버렸다. 학창 시절 내내 중상위권이었던 나는 중상위권이 정체성이 되어 버렸다. 그래도 쉽사리 불평할 수 없는 것은 지금까지 목표 지점에 도달해왔기 때문이다. 겨우 턱걸이로라도. 앞으로는 장담할 수 없지만.
내게 열정이 없다는 말을 한 사람은 없다. 스스로 깨달은 점일 뿐이다. 어쩌면 내가 열정적으로 몰두하는 캐릭터가 등장하는 이야기를 좋아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들은 성공과 실패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너무나 행복해 보인다. 물론 만들어진 이야기이기에 이는 청춘과 열정에 대한 판타지일 뿐이다. 하지만 그런 '청춘'의 나이에 속하는 나도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 마음이 들고 마는 것이다. 배낭여행을 떠나거나, 친구들과 영화를 만들거나, 좋아하는 무언가에 완전히 몰두하거나 하는 그런 청춘. 남 탓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청춘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한 미디어가 내게 좋은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있다. 지금도 나는 청춘이지만, 그렇게 행복하지도 열정적이지도 않다. 그리고 슬슬 늦어버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는 나이이기도 하다. 대학을 졸업하면 청춘을 빙자해 '쓸데없는 짓'을 할 당위성이 사라지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이건 두려운 일이다. 실패의 책임이 점점 무거워지고 시간을 보내며 한 일이 그 자체로 있을 수 없다. 이 활동이 다른 것으로 이어지고 그것이 다른 것으로 이어져 결과적으로 나의 미래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자리한다. 너무 많은 사람이 자신이 사랑하는 것으로 성공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열정적으로 좋아하는 것이 없는 나는 성공할 수 없다. 열정적일 줄 모르는 나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 하지만 좋아하는 것을 하겠다고 대학에 온 나는 그들처럼 되어야 한다. 좋아하는 것을 선택했으니까. 기존의 성공 가도를 벗어난 사람들이 일반화되면서, 나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과 함께 진작 하지 않았기에 너무 늦었다는 마음이 동시에 자리한다. 고작 25살짜리가 뭐가 늦었냐고 쉽게들 말하지만, 막상 그 나이 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과거의 시간을 쉽게 미화하는 것은 그 시기를 이미 지나왔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도 어딜 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마지막 방학이지만 나는 이번에도 어떤 것도 해내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한 학기 동안 졸업 전시를 준비하고 일주일의 전시로 5년의 대학 시절이 끝나겠지. 다음에 뭘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목표와 방법이 확실했다. 지금은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모른다.
여름은 청춘이고 열정이고 낭만이지만, 나의 마지막 여름은 이렇게 지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