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쉼인가? 그렇다면 나는 쉬어본 적 없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솔직히 어떻게 쉬어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에 가깝다. 이렇게 말하고 보면 워커 홀릭처럼 느껴지겠지만, 나는 지금 일을 하지 않는다. 아마도 일을 하지 않고 학교를 다니지 않는 지금, 아무것도 하지 않음의 죄책감에 쉴 새 없이 뭔가를 하고 있기만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쉬는지 모르겠다. 나는 계속 뭔가를 쓰고, 그리고, 만들어야만 한다. 그건 죄책감과 불안에서 오기도 하지만, 대부분 창작 욕구에서 온다. 그림을 그리겠다고 대학에 간 나는, 창작하지 않고서는 하루도 넘어가지 못하게 되었다. 딱히 좋은 습관이라거나 태도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떨 때는 그저 그리는 것에서 벗어나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몇 달간 그림을 한 번도 그리지 않다가 드디어 그린 그림에서 전보다 실력이 향상되었음을 느낄 때, 그 사실을 다시금 깨닫는다. 단순히 그리기만 한다고 실력이 느는 것은 아니다.
시각 예술의 영역에서는 보는 것도 공부의 일부이다. 사실, 보는 것이 더 중요할 때도 있다. 타인의 창작물을 보는 것만으로도 감각을 유지하고 키울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감각이라는 건 색, 질감, 구도, 형태 등의 시각적 요소의 조화에 대한 감각을 말한다. 하지만 이것의 문제는 보는 것 자체가 공부가 되어버린다는 점이다. 즐기기는 점점 힘들어지고 계속 분석하게만 된다. 종래에는 어떤 시각적 창작물이라도 나의 실력과 비교하게 되면서 보는 것 마저 심적으로 힘들어질 때가 온다. 다른 사람의 그림이나 영상도 볼 수 없을 정도의 슬럼프는 생각보다 자주 온다. 그건 내가 그림을 그리며 살기로 결정한 사람이어서겠지만.
그럴 때 과제라도 쌓여있다면 오히려 도움이 된다. 하지만 할 일이 없는 방학에 슬럼프가 찾아오면 답답하기 짝이 없다. 나는 창작을 하던 창작물을 소비하던 둘 중 하나의 방법으로 지금껏 시간을 보냈는데, 일순간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하루의 대부분을 의자에 앉아 손을 움직이며 보낸다. 그걸 멈추면 앉아 있기도 힘들어 방 안을 서성인다. 하지만 할 일 없기는 매한가지라 다시 주저앉는다. 이 상태가 지속되면 점점 기분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다. 이유 없이 기분이 별로 좋지 않고 우울하며 답답한 시기가 찾아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나는 그런 마음을 해소하는 방법도 잘 모른다. 뭘 해야 내가 기분이 좋아지는 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가장 잘 안다고 하지만, 사실 그런 것도 아니다. 특히 당연하게 있어야 할 시스템 같은 것들이 내게 없다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나는 이걸 하면 기분이 좋아져. 쉴 때는 이런 걸 해. 이런 것들을 명확히 구축해 놓지 않으니 위급 상황이 오면 그대로 침몰하기 일쑤인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누구는 친구들을 만나거나 산책을 하러 나가기도 한다. 뭘 해야 하는지 모르는 나는 그냥 시간을 좀 낭비하다가 놀지도 뭘 하지도 못한 상태로 하루를 끝맺는다. 그런 슬럼프 기간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죄책감과 그저 시간을 낭비만 했다는 후회가 함께 쌓인다. 그리기 싫으면 그려지지 않고, 써지지 않으면 쓰기 싫은 것이다. 하지만 생산적이지 않은 시간을 보내는 것은 나를 즐겁게 하는 것과 별개로 시간 낭비처럼 느껴지고 만다. 결국 나는 가만히 앉아 존재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된 것 같다. 현존하지 못하고 과거와 미래, 화면 위의 어딘가를 계속 방황하고만 있다. 집중력이 떨어지는 것인지 뭘 해야 할지 모르는 것인지 그저 지루한 것인지.
쏟아지는 외부 자극에 지친 현대인들이 힐링이라는 키워드에 집중하기 시작한 것도 이런 이유일 것이다. 도대체 뭘 해야 나는 쉴 수 있는 것인지. 어떻게 쉬어야 계속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을지. 살아갈 힘이 없어도 시간과 책임에 떠밀려 살아가고 만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없는 삶이다. 뭔가를 만들어내지 않으면 존재의 의미를 상실하고 마는 생산자들의 삶이기도 하다. 일 없이는 돈도 없고 돈 없이는 생활도 없다. 건조한 일상에서 뭐라도 나를 충만하게 하는 것을 찾지 않으면, 이 모든 것을 지속할 의미가 없어질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계속 지치지만 계속 가야 하기에 계속 치유해야만 한다.
나는 뭘 해야 행복한지 모르겠다. 행복이 뭔지도 모르겠다. 뭘 하면서 쉬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쉴 자격이나 있는지 모르겠다. 쉬고 싶은 것인지 그냥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도망쳐야 행복해 질지도 모르고, 맞서야 행복을 찾을지도 모른다. 티끌만 한 행복들을 긁어 모아 들여다보면서 그런 걸 다시 느낄 수 있을 거라고 믿으며 사는 것일 수도 있다. 행복한 순간이라고 믿는 기억들도 그저 지금의 내가 자시 해석한 결과일 수도 있다. 진짜 행복하다고 느끼던 순간은 없었을 수도 있다. 행복 자체가 환상일 수도 있다.
쉬고 싶지만 뭐에서 떠나고 싶은지 알 수 없다. 어쩔 때는 뇌를 꺼버리고 세상과 시간을 잊어버리고 싶다. 하지만 결국 책상 앞에 앉고 마는 충동이 생산성에 대한 집착인지, 창작자로서의 영감인지는 먼 미래의 나도 알아내지 못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