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야 Sep 12. 2022

22 이젠 추석에 갈 곳이 없다




이번 추석에는 아무 데도 가지 않았다. 작년 추석도 그랬고 재작년 추석도 그랬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가족들은 점점 줄어들어서, 이제는 모두가 명절에 모이는 풍경 같은 건 기대할 수 없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멀어져 그들에게 더 가까운 가족과 시간을 보내거나, 이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구나. 이제는 갈 곳이 없지. 할아버지의 집은 갈 수 없는, 다른 사람의 집이 되었으니.




엄마는 명절에 갈 곳이 없다며 슬퍼했다. 명절 자체보다는 사실 할아버지가 보고 싶은 것이겠지. 나는 누구도 그리워해 본 적이 없어서, 그런 감정에 공감도 동의도 진심으로 하지 못한다. 항상 대충 얼버무리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엄마는 엄마의 아빠가 보고 싶고, 엄마의 엄마가 보고 싶지만, 나는 누구도 그렇게 보고 싶지 않다. 가족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하게 느껴야 하는 본능처럼 이야기되지만, 나에게는 사랑 같은 본능은 없는 모양이다. 피를 나눴다는 이유도 그들에게 가까움을 느껴야 하는 건가? 정신적으로 가깝지 않다면 DNA를 나눈다고 해도 가까운 사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어쩌면 누군가 세상에서 사라졌고 그들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사실이 그리움을 야기하는 것도 같다. 나에게는 그것조차 해당하지 않는 것 같지만. 나도 엄마가 사라지고 나서야 엄마가 그리워질까. 그건 웃기는 일이다.


명절은 불편하게 앉아 밥을 먹고 익숙하지 않은 사람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시간이다. 나는 어른들의 어색한 격려가 못내 불편하고 꺼지는 법이 없는 텔레비전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채널은 언제나 뉴스나 골프 중계 같은 것에 맞춰져 있다. 과일과 평소에는 잘 먹지 않는 종류의 과자를 멍하니 먹으며 시간을 보낸다. 명절의 모습은 사람들마다 다르겠지만, 내가 경험한 명절을 한 번도 시끌벅적하지 않았다. 부모님은 언제나 고요를 선호해 왔기에 그런 성향이 어디에서 왔을지 정도는 짐작되었다. 명절에 부모님의 부모님을 만나러 가면, 항상 조용하고 먼지 쌓인 책장이나 나프탈렌 냄새가 나는 옷장 따위가 나를 반겼다. 흥미로운 물건들이 많았다. 모르는 사람들의 흑백 사진, 모르는 언어로 된 책들, 모르는 기능의 물건들. 한때는 누군가의 아이였던, 누군가의 부모도 되고 누군가를 위해 일해본 적도 있는 오래된 사람들의 집을 탐험해 보는 것이, 어린 나에게는 명절이었다.


많은 이들이 명절에 제사를 지내거나 친척들과 전부 모여 게임도 하고 하는 모양이다. 우리 집은 제사를 지내지 않았고, 친척들과도 거의 만나지 않았다. 외가에서는 내가 첫째, 친가에서는 미국에서 사는 친척들 아래로 첫째였다. 항상 나와 동생뿐이었다. 그래서 어린 친척들이 생기고 나서도 나를 귀찮게 굴거나 하는 일이 없었다. 이미 나이 차이가 크게 났고, 친척 동생들은 어색함에 표정이 사라진 내게 쉽게 다가오지 못했다. 나는 먹고 싶지 않은 음식을 억지로 먹고, 관심도 없는 과일을 손에 쥔 채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친척들과 친하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나는 알지 못하는 감정이다. 알고 싶은지도 확신할 수 없다. 필수적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것들, 그리고 이제 와서 얻을 수 없는 것들에 미련을 가질 이유는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집의 문화란 으레 그런 것이겠지, 하고 넘겨야 하는 문제일 때가 많다. 부조리만 아니라면.


기혼 여성들이 지긋지긋해하는 시즌이다. 엄마도 모두가 집에만 있는 연휴가 끔찍하다며 이마를 문질렀다. 그녀가 먹여야 하는 식충이 중 하나에 불과하니 가만히 있는 수밖에. 명절이라고 특별한 음식을 먹고 싶다는 생각은 사실 들지 않았다. 하지만 음식을 만드는 입장에서는 명절 음식을 조금이라도 만들고 싶은 모양이었다. 더 이상 만들 일이 없으니 더 그런 걸까. 나도 어디도 가지 않고 어떤 음식도 특별하게 먹지 않는 날이 온다면 그런 걸 원하게 될까. 인간은 해야 하는 걸 가장 하기 싫어하고, 존재하던 것이 존재하지 않을 때 가장 그리워지는 존재처럼 보인다. 나도 인간으로서 가지는 모순을 몸에 지닌 채 태어났을 것이다. 그건 부모, 부모의 부모, 부모의 부모의 부모를 쭉 따라서 내려온 본능이나 다름없다. 인간은 선택권을 줄 때 가장 행복한 것이 분명하다.




설날이나 추석이나 우리 가족은 어디도 가지 않는다. 가끔 하는 전화 정도가 다른 가족들과의 유일한 접촉이나 다름없다. 가끔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면 나와 동생이 어떻게 될지 생각해 본다. 그냥 서서히 멀어질까. 더 나이가 들면서 가족이라는 구조를 그리워하게 될까. 어떤 것도 상상의 영역을 벗어난 듯 보인다.

매거진의 이전글 21 마감은 다가오지만 나는 아무 생각이 없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