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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창래 Nov 13. 2019

환각제 시대의 인간시장

-1980년대 베스트셀러:  ≪인간시장≫이라는 무협지

1980년대 분위기를 이해하려면 당시 군사독재정권의 3S 정책을 알아야 한다. 3S란 스포츠

sports, 스크린 Screen, 섹스 Sex를 말한다. 사람들의 관심을 엔터테인먼트에 묶어두려는 우민화 정책이다. 프로스포츠가 모두 1980년대 초에(스포츠), 컬러텔레비전 방송이 1980년에(스크린) 시작되었고, 포르노 테이프가 대중적으로 보급되면서 에로영화도 많이 제작되었다. 나체로 말을 타는 '명'장면으로 유명한 <애마부인> 시리즈가 1982년에 시작되었다. 


출판계에도 그런 분위기가 어느 정도 스며들었다. 김홍신의 ≪인간시장≫은 1981년에 1권이 나왔고, 6개월마다 한 권씩 출간되었다. 주인공은 절대고수 장총찬이다(장총을 찬 사람임을 암시한다. 권총찬이 검열 때문에 장총찬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당시 부패했던 지배층을 악으로 규정하고 종횡무진 통쾌하게 쳐부순다. 옴니버스 형식으로 당대의 부패한 지배층 거의 모두를 처벌했다. 거기에 자주 노골적인 어법으로 에로틱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그런 주인공에게 독자들은 열광했다. 그리하여 2년 만에 한국 출판 사상 최초의 공식적인 밀리언셀러가 되었다. 


나는 베스트셀러를 잘 읽지 않았지만, 궁금해서 보았다. 도대체 무슨 내용이기에? 무협지였다. 배경만 당대 한국사회였을 뿐이다. 주인공은 겨우 스물두 살이었지만 거의 모든 무술에 통달했는데, 심지어 소매치기나 화투 기술까지도 그랬다. 


이런 무협지 스타일의 ‘엔터테인먼트’는 1980년대가 끝날 때까지 주욱 이어진다. 1986년에는 당시 메이저 단행본 출판사였던 고려원에서 ≪영웅문≫이 출간되었고 8백만 부가 넘는 판매량을 기록했다. 1988년에는 무협지 언어를 사용해서 쓴 유하의 시, <무림일기>(시집은 1989년)가 화제가 되었고, 김영하의 첫 번째 소설집도 ≪무협 학생운동≫(1992년)이었다. 1980년대 한국은 무협지 세계였던 것이다. 

사실 무협지는 3S 정책의 목적에 ‘상당 부분’ 봉사한다. 대리만족으로 끝나는 환각제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책이기 때문에 영향력이 조금 다를 수 있다. 당시 지배층의 반응이 그랬다. 동시대를 배경으로 했기 때문에(당시 거물급 인사의 실명까지 거론했다고 하는데, 그게 누군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인간시장≫의 작가 김홍신은 협박 공갈에 시달렸고 가족은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원래 몸이 약했던 아내는 아예 늘상 환자로 살아야 했다(고 한다). 


조금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또 다른 반체제 성향의 무협지와 운명이 크게 달랐다는 점이다. 비슷한 시기에 나온 은밀한 베스트셀러, ≪무림파천황≫이 있었다. 이 책은 모두 압수되어 불태워졌고 작가 박영창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어 2년 동안 감방살이를 해야 했다. 그러나 김홍신은 언론으로 진출해서 MC가 되었고, 국회의원이 되었다. 


당연히 환각제 같은 작품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각성제 같은 작품들도 쏟아졌다. 황석영의 ≪장길산≫(1974~1984), 조정래의 ≪태백산맥≫(1983~1989), 김주영의 ≪객주≫(1979~1984), 박경리의 ≪토지≫(1980, 3부까지)로 현대 한국문학의 고전들이다. 

이 작품들 역시 베스트셀러였다. 현실적인 삶의 구체성에 뿌리박고 고뇌하며 변화를 추구하는 진지한 독자들도 충분히 많았던 것이다. 나는 각성제 같은 작품들이 더 재미있었다. 독서는 기회비용을 지불하는 과정이다. 환각제 같은 책을 읽으면 각성제 같은 책을 읽을 시간이 사라진다. ≪인간시장≫이 무협지라는 걸 알고 나서는 더 읽지 않았다. 


-<동아일보> 2019. 10.19 <[책의 향기]당대 부조리와 싸운 절대고수 등장… 대중은 열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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