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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창래 Dec 07. 2019

병원이 해줄 수 있는 건 없습니다

-스핀오프 32

해마다 오월이 오면 지독한 소화불량이 시작되었다. 뭐든 먹기만 하면 가슴이 답답했다. 열도 조금 올랐다. 소화제를 먹어도 소용이 없고, 침을 맞거나 마사지를 받아도 조금 나을 뿐 해소되지 않았다. 굶는 게 가장 편했다. 언제까지나 그럴 수 없으니 적게 먹었다(그래도 마찬가지지만). 대략 한 달이나 한 달 반 정도가 지나면 저절로 괜찮아졌다. 그 동안에는 답답하고 열이 나니 불편하고 괴롭기 짝이 없었다. 그래도 병원에 가질 않았다. 참 미련했다.


오륙 년 전이었을 것이다.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병원에 가본 적이 있긴 하다. 내 이야기를 듣더니 의사는 검사를 좀 해보자고 했다.

혹시 아침식사를 하셨나요?

어제저녁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잘 되었군요.

'잘 되었다고요?'

되물어보려다 말을 삼켰다. 내가 지금 예민한 거야.

 

혈액검사와 위 내시경부터 시작했다. 검사할 게 많다면서 피를 많이도 뽑았다(나중에 보니 바늘을 찔렀던 자리가 멍이 들어 있었다). 그 다음에는 내시경실에 갔다. 그때만 해도 젊었던가 보다. 내시경할 때 마취 같은 건 하지 않겠다고 했다. 담당자는 '혼자' 오신 거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했지만, 묻는 이유를 몰랐다. 그가 왜 좀 안쓰러워하는지도. 기다리는 사람이 많아서 내 차례가 되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거니 했다. 그런데 금방 내 차례가 왔다.


가스 배출을 위한 물약을 먹었고, 입안에 가벼운 마취제를 뿌렸다. 조금 있다가 모로 눕게 하고 마우스피스를 끼더니 관을 몸안으로 집어넣었다. 숨은 코로 들이마시고 입으로 나가게 했고, 침은 삼키지 말고 흐르게 두라고 해서 바보처럼 흘렸다. 더 이상은 견디지 못하고 토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자 끝났다. 삼사 분쯤이라는데 나에게는 삼사십 분 같았다.  

끝나고 나오면서 물었다. 내시경 받는 사람들이 늘 이렇게나 많은가요?

아뇨, 기다리는 분들은 모두 보호자예요.

그제야 내시경 담당자의 표정을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화장실에 갔을 때 더욱더. 거울을 보니 내 얼굴은 심하게 초췌했고(나는 얼굴 살부터 빠진다) 찢어진 청바지와 지나치게 낡아 보이는(실제로는 낡은 게 아니지만) 티셔츠가 너무 헐렁했다.  


두 시간 뒤에 다시 진료실로 갔다. 혈액검사와 내시경 결과를 함께 검토한 다음, 어떤 검사를 더 할 것인지 알려주겠다고 했으니. 의사는 모니터에 내 데이터를 띄우더니 말이 없었다. 옆모습이라 그런지 아주 심각해 보였다. 일이 분 정도였을 것이다. 고막이 아플 정도로 정적이 감돌았다. 두려웠던 것일까 살짝 소름이 돋았다.


얼마나 심각한 상황일까? 내가 병원에 너무 늦게 온 것일까? 암일까? 시한부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일까?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이윽고 의사가 말했다.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지금 선생님의 경우에는 병원에서 해드릴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의사만 쳐다보았다. 조금 당황하는 듯했다. 의사는 다시 모니터를 보았다. 이번에는 수치를 하나하나 짚어가며 빠르게 말했다. 전문용어는 기억나지 않지만 무슨 말인지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수치가 정상'이라는 것이었니. 말하자면 이것도 정상, 저것도 정상, 정상 범위 안에 들지 않는 것이 없다. 모든 수치가 놀라울 정도로 완벽하게 정상인데 도대체 왜 소화가 안 된다는 거지? 이해할 수가 없네. 뭐 이런 것이었다. 나는 귀를 의심하면서도 맥이 탁 풀렸다. 하여튼 어떤 의사들은 자기 말이 환자에게 어떻게 들릴지 조금도 모른다.


의사는 내시경 검사 화면을 내 쪽으로 돌려서 보여주면서 말했다.

깨끗해도 이렇게 깨끗할 수가 있나 싶어요. 오십 대의 위장이 아니라 이십 대의 위장 같습니다.

의사는 화가 좀 난 것처럼 보였다.

혈액검사와 내시경 결과로 볼 때 다른 검사는 전혀 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그러고는 끝났으니 돌아가라고 했다.

조금 당황스러웠다.

저는 아직 가슴이 많이 답답한데요?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이런 경우에는 병원에서 해드릴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셨으니 소화제나 좀 많이 처방해 드릴게요.

'소화제나 처 드세요?'라는 거임? 물론 이 말도 내뱉지는 못했다.


그날은 소화제가 가득 든 약봉투 하나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거기가 김포공항으로 향하는 대로변이었는데, 병원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꽤 큰 병원이었는데. 물 한 잔 마시고 꺽꺽대며 돌아왔다. 뭐든 먹으면 명치가 아프고 가슴이 답답할 뿐만 아니라 열도 조금 오르는데 그저 소화제 몇 알 먹고 견뎌야 한단다. 현대의학이 해 줄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니!

참 희한한 일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조심조심 죽을 먹었다. 먹으면서 느낄 수 있었다. 속이 편했다. 그래도 조심해야지. 서재 책상에 앉아 책을 읽은 지 삼십 분쯤 지났을까.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배가 다 고프다니! 소화불량으로 고생하는 동안에는 배고픔을 느끼지 못한다. 이건 소화기능이 돌아온다는 신호였다. 식은 밥을 데워서 나물 반찬과 함께 조금 먹어 보았다. 다시 삼십 분이 지났다. 역시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번에는 잠깐 외출하기로 했다(그때는 아직 내가 요리할 줄 모르는 때였고, 아내는 바깥 일로 바빠서 집에 있을 때가 드물었다). 추어탕을 사 먹었다. 다시 삼십 분이 지났지만 아무렇지도 않았다. 만일을 위해 챙겨갔던 소화제도 먹을 필요가 없었다. 갑자기 소화불량으로 인한 괴로움이 싹 사라진 것이다. 마법처럼 씻은 듯이. 단지 검사를 받았을 뿐인데.


그 많은 소화제는 한 알도 먹지 못했다. 적어도 그 해의 소화불량은 끝이 났으니. 통과의례처럼 겪는 그 소화불량은 올해도 비껴가지 않았다. 언제나 지금의 고통이 가장 크기 때문일까.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괴로웠다. 일주일을 참다가 내시경 검사를 해 보기로 했다. 오륙 년 만이다. 암 투병하는 아내를 돌보며 병원을 많이 다니면서 병과 병원에 대한 생각도 달라졌다. 굳이 비수면 내시경을 하며 괴로움을 참을 필요가 없다. 수면내시경을 하기로 했다. 예약이 필요하다기에 사흘 뒤로 잡았다. 보호자가 있으면 좋겠지만 없어도 괜찮을 거라고 했다. 잠깐 자고 일어나면 직접 운전해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그래도 걱정스러웠다. 마취가 덜 깨어 운전이 위험하지는 않을까. 걸어갔다가 걸어올까. 그러기에는 너무 멀다. 택시 타고 다녀올까. 이상하게 여기는 택시 잡기가 쉽지 않다. 다 마땅치가 않다. 방법이 생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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