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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창래 Jan 09. 2020

행운

스타벅스에 앉아 강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언제나 이렇게 한다. 강의 장소에 한 시간쯤 일찍 도착해서 인문학 언어에 몰입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인문학은 이면에서 움직일 뿐 표면에는 드러나지 않는다. 잊고 지낼 때가 많다. 강의할 때는 아우라를 발산하는 망토를 걸치는 것이 좋다. 몰입하면 망토를 꺼낼 수 있다. 그런 날에는 청중들도 몰입한다. 두세 시간 꼼짝도 하지 않고 내 이야기를 듣는다. 지금까지 내 강의가 이어지는 이유는 그 때문일 것이다. ‘가능하면 어려운 책’을 읽는다. 어려운 개념을 일상 언어로 번역해서 읽는 과정에서 비교적 쉽게 몰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독할 때에는 연필이 필요하다. 끊임없이 흘러넘치는 생각을 책의 빈 공간에 적어두어야 한다. 그날따라 아무리 찾아도 연필이 없었다. 잠깐 나가서 연필을 사 왔다. 앉으며 보니 내 자리 맞은편에서 한 여자가 내 책을 읽고 있었다. 틈틈이 곁눈질을 해 보았지만 꼼짝도 않고 집중한다. 간간히 검색하면서. 강의 준비에 집중했다. 강의 시간에 되어 가방을 챙기면서 보니 그 여자가 없었다. 뒤에서 누가 불렀다. 그 여자였다. ≪책의 정신≫을 내밀면서 말했다.

“사인 좀 해주시면 안 될까요?”

삼십 대일까? 사십 대일까? 요즘 여자들은 나이를 알아맞히기 어렵다. 심지어 오십대인지도. ㅠ.ㅠ

“예. 그러죠.” 나는 필기구를 담아 다니는 가죽 주머니를 풀었다. 이름을 묻고 사인을 했다. 책을 건네주었다.

“그럼......”

그러자 다시 말을 붙인다.

“혹시… 아까 책에 메모하시던 연필을 제가 얻을 수 없을까요? 그 연필이 저에게 행운을 가져다줄지 모르겠다 싶어서요.”

조금 뜬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그런 정도는 어려운 게 아니다.

“그러죠.”

연필을 꺼내 건네주었다.

“너무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셔요. 얼마 전에 영화를 보았는데, 재미있는 장면이 나오더라고요. 우디 알렌, 프랜시스 코폴라, 마틴 스콜세지가 옴니버스로 만든 <뉴욕스토리>라는 영화였어요. 성공한 화가인 라이오넬 더비의 전시회가 열렸답니다. 손님들에게 음료를 서빙하던 한 아가씨가 더비의  요구대로 화이트 와인을 따라주고는 술을 마시는 더비의 손을 살짝 만졌어요. 더비는 조금 놀란 표정으로 물어요. 뭐 하는 거냐고. 아가씨 행운을 위해서라고 대답합니다. 자기도 화가가 되고 싶은데 성공한 화가의 손을 만지면 행운이 따를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는 거지요. 그런데 비싼 값을 치르면 더 효과가 크다고 해요.”

그 여자는 자기 연필통에서 아주 멋진 샤프펜슬을 꺼내 주었다. 그렇잖아도 좋은 샤프펜슬을 하나 사려던 참이었다. 아직은 마음에 드는 것을 보지 못해서 사지 않은 것이고. 외관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이 나무는 떡갈나무예요.”

“아닙니다. 이건 좀 부담스럽습니다.”

“그러면 저에게 주신 연필이 가진 행운이 그다지 크지 않을 텐데요. 받아주셔요. 그리고… 다음에 여기에서 또 뵈면 시간을 조금 내주셔요. 여쭤보고 싶은 게 좀 있어서요. 사실은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를 먼저 읽었어요. 오늘은 그 책을 집에 두고 와서 사인을 못받아 아쉬워요.”

나서야 했다. 강의 시간에 늦을 수는 없는 일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 주 뒤 같은 요일에 뵙죠. 오늘보다 한 시간쯤 일찍 오겠습니다.”     

서둘러 강의실로 가면서 생각이 났다. 오늘 내가 몇 시에 왔는지 그 여자는 알고 있었다는 뜻인가? 한 시간 일찍이라는 말에 그저 고개를 끄덕였으니.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비슷한 이야기 하나가 떠올랐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나오는 이야기다. 고대  로마 공화정 시대의 보수적인 정치가 술라는 검투사 경기장에서 시합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때 술라의 뒤를 지나 자기 자리로 가던  젊은 여자가 그의 어깨를 만지고 토가에서 실밥을 뽑아냈다. 그리고는 그 실밥을 들고 그대로 자기 자리로 가 버렸다. 술라는 자기도  모르게 여자를 바라보았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마주 바라보고 말했다.

“이상하게 생각지 마세요. 당신이 누리고 있는 행운을 저도 조금이나마 얻고 싶어서 그랬을 뿐이니까요.”

로마의 한 시대를 이끌었던 술라는 언제나 자신은 행운아라고 말했던 사람이다.


고개를 세차게 몇 번 흔들었다. 곧 강의가 시작된다. 주제에 몰입해야 했다. 갑자기 생긴 이 뜻밖의 사건을 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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